![[디지털인문학] 다가온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시대](http://contents.dt.co.kr/images/201603/2016032502102251607002[1].jpg?var=4509 "[디지털인문학] 다가온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시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길이 로마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이다. 기원전 312년에 이 길을 짓기 시작한 사람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이다. 그는 로마가 제국으로 갈 수 있는 탄탄대로를 닦은 셈이다. 그는 자신의 과업을 과시라도 하듯,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짓는 존재다"(homo faber suae quisque fortunae)
아피우스의 이 명언에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말을 떼어내 유럽의 지성인들은 '도구적 인간', '일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책에서 이 개념을 이용해 인간의 지적인 특징을 잘 설명했다. '인간은 수많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건을 만들어내는 도구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도구들을 만들 수 있는 도구들도 만들어낸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물을 변형시켜 나갈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은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다른 동물들이 자신의 몸의 일부를 발전시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과는 다른 '창조적 진화'이다. 맹수들은 빠른 발과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갈고 닦으며 진화해 왔고, 새들은 날개와 부리, 발톱을 자신의 삶에 최적화시켜 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연약한 신체 자체를 강하게 발전시키는 쪽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 그대로 뇌를 고도로 발전시키며 '지혜'(sapientia)를 갈고 닦아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거의 모든 약점들을 보완하고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존재'인 '호모 파베르'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어 치타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리게 되었고, 비행기를 만들어 독수리보다 더 높이 더 빨리 날 수 있게 되었다. 드릴을 발명한 인간은 딱따구리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나무를 뚫을 수 있다. 안경, 망원경, 현미경은 눈의 약점을 보완해서 시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인공위성을 띄우고 전화기를 만들어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보청기를 만들어 약해져 가는 청력을 보완하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뇌를 발전시키는 데에 진화의 역량을 총동원했기 때문이다. 뇌는 인간의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는 도구들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뇌를 고도로 개발하는 인간의 진화 전략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우리는 지난 3월에 인상적인 장면 속에서 목격했다.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의 대결은 인간이 뇌의 약점 자체를 찾아내고 보완할 수 있는 '물건'마저 성공적으로 만들어냈음을 전 세계에 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인간의 뇌가 뇌 자체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낸 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뇌를 이용해서 자신의 다른 부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낸 것과는 분명히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안경과 보청기를 끼고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물건들은 자체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인간이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다른 모든 도구들을 가능하게 한 뇌의 약점을 보완한, '도구로서의 뇌'인 인공지능은 과연 안전한가.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완벽한 뇌로 자율적으로 생각하면서 불완전한 뇌를 가진 우리를 통제하는 것은 아닌가.
다른 부분은 인간에게 부수적인 반면, 뇌는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때, 그 본질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 지점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호모 사피엔스'를 규정하던 전통적인 정의가 바뀔 때,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의 세계는 어떤 것일지, 그 안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일이 다각도로 필요한 시점에 우리가 온 것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