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총체적 사회혁신` 필요하다](http://contents.dt.co.kr/images/201612/2016120202102251607001[1].jpg?var=4024 "[디지털인문학] `총체적 사회혁신` 필요하다")
요즈음 우리 한국사회의 상태는 뭐라 설명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아니 완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정부 상태다. 그래도 눈을 뜨면 천만 다행히도 또 하루가 큰 탈 없이 지나가고 있다. 물론 해가 떠서 밤이 될 때까지, 국민들은 생각하는 건 고사하고 정신 차릴 틈조차 없다. 황당하고 끔찍한 기사와 의혹들이 폭탄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엽기적인 막장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 같다. 국민들은 분노하다가 탄식하고, 냉소를 짓다가 개탄하고, 다시 분노하고 한탄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중간에 끼어 있는 탄식과 냉소는 몸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다.
조금 근엄한 식자들은 마침내 '명예혁명', '시민혁명'이라는 말을 꺼내 들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내 기억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100만이 훨씬 넘는 시민들이 이렇게 매주 평화적으로 시위한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최근 한 달 동안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국민 저항기를 몸으로 쓰는 중이다.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하고, 외신들도 상당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70년대부터 키워온 민주, 자유, 평등의 이념은 예상보다 훨씬 튼실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자, 해학, 기지가 넘치는 시위문화는 누가 봐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혁명'이라 부르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 께름칙하고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새누리당과 한나라당에서, 박정희 시대부터, 아니면 해방 공간과 남북 분단부터? 모든 파렴치한 기만과 범죄는 전부 다 드러난 걸까. 대통령의 7시간 블랙아웃의 진실은? 우리의 충격과 분노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96%의 여론을 무시하고 청와대에 버티고 있는 그녀는 누가 뽑았는가.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녀는 우리 자신의 악몽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악몽. 아직은 언제 끝날지 모를 역사상 최악의 악몽.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 악몽이 느닷없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 서서히 만들어졌다. 박근혜라는 악몽은 수많은 국민들이 적어도 20여 년전부터 서서히 만들고 꾸어온 백일몽이며 환상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이 환상이 거대한 신화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끔찍한 허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국민들이 수많은 기대와 욕망을 그녀에게 투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도자를 비판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매우 부실했던 것이다. 양적 증가가 어느 순간 질로 전환되듯, 지속적으로 투사된 기대와 욕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실재와 확신이 됐다. 또한 언론, 정당, 검찰, 지식인, 시민사회도 그녀의 무능과 인격적 결함을 정확히 간파하는 데 실패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쓴 <일방통행로>(1928)에는 꿈에서 깨는 일에 관한 묘한 단편이 나온다. "아침 공복 시에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속담이 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자는 사실 여전히 꿈에 취해 있는 상태이다. (…) 이런 상태에서 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는 화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꿈의 세계와 반쯤 결탁한 상태에서 사람은 꿈의 세계를 누설하는 말을 하게 되고, 이로써 꿈의 세계로부터 오는 복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벤야민이 꿈에서 바로 깨어났을 때 꿈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막 깨어나서 꿈에 대해 얘기하는 자에게 꿈의 세계가 복수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 이 비유적인 단편의 뜻을 투명하게 풀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꿈에서 벗어나는 일이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눈을 떴다고 해서, 꿈인 걸 알게 되었다고 해서 꿈에서 빠져나왔다고 여기면 큰 오산이다. 잘못된 꿈, 특히 거대한 집단의 강력한 꿈은 깨어난 후에도 꿈꾸었던 사람들을 아주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억압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국민의 상황이 바로 이런 상태다. 악몽에서 혁명으로 가는 길은 아직 요원하다. 우리는 위기의 갈림길, 전진과 퇴행의 갈림길 위에 있다. 박근혜라는 악몽에서 이제 막 깨어났지만, 이 악몽의 깊은 뿌리를 제거하고 그 힘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자기비판과 자기혁신을 필요로 한다. 이때 자기비판은 그녀에게 투사된 기대와 욕망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쳐 해체하는 일을 가리키며, 자기혁신은 광장의 국민들 모두가 공감하는 기본적인 사회정치적 개혁을 가리킨다. 이 개혁의 과제들은 구체적으로, 공영 방송사의 공정성 혁신,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 확보, 국회의원 선거법 개혁(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프랑스식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 정경유착 근절과 경제 민주화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과제에서 분명한 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악몽은 또 다른 형태로 되살아나서 시민혁명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우리 사회를 재차 수십 년 뒤로 퇴행시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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