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거미가 된 아라크네의 당당한 오만

[ ] | 2017-07-27 18:00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디지털인문학] 거미가 된 아라크네의 당당한 오만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아라크네라는 소녀가 있었다. 여신도 요정도 아니고, 하다못해 공주나 귀한 집 아씨도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평민 출신 소녀였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흙수저',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소아시아 뤼디아 지방에 널리 퍼졌고, 마침내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의 명성은 베 짜는 탁월한 솜씨 때문이었다. 그녀의 베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베를 짜는 모습 자체가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의 공연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솜씨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감탄했다. "저런 솜씨는 직물과 솜씨의 여신 아테나가 가르쳐준 걸 거야!" 그러나 아라크네는 못마땅했다. "아니에요, 저는 아테나 여신에게 배우지 않았어요. 솜씨는 오히려 제가 더 뛰어날 걸요. 여신과 겨루어도 자신 있어요."

그녀의 당돌함에 놀란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아테나 자신이 그녀의 솜씨와 태도에 언짢았다. 인간인 주제에 감히 여신과 겨루려하다니, 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테나는 노파로 변장하고 아라크네를 찾아가, 여신에게 무례한 말을 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라고 했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거부했다. 화가 난 아테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여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며 모두 엎드렸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당돌하게 결투를 신청했다. 이리하여 인간과 신 사이에 '베짜기 배틀'이 벌어졌다.

아테나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베를 짜고 형형색색의 실로 올륌포스 12신의 위용을 아로새겨 넣었고, 한 가운데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경쟁하여 승리를 거두는 자신의 찬란한 모습을 수놓았다. 네 모퉁이에는 신에게 도전하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인간들을 그려넣었다. 한마디로 '나에게 까불면 이렇게 끝장난다!'라는 메시지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솜씨에 감탄하고 그녀의 메시지에 전율했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당당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가슴을 압박하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자신의 메시지를 용감하게 던졌다. 신들의 절제되지 못한 욕망과 제어되지 않는 폭력을 낱낱이 고발하는 그림을 수놓았던 것이다. 최고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아폴론,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적인 능력과 권위를 남용하여 어떻게 숱한 여인들을 유린했는지를 수놓았다.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이 완벽했다.

아테나 여신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솜씨와 기술을 관장하는 불멸하는 지고의 지혜의 여신이 한갓 여인에게 패배한 것이다. 여인의 탁월한 솜씨가 아테네 여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라크네가 그려넣은 그림들이 신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불경스러운 메시지였기에 여신은 권위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고, 신들의 비행을 수놓은 아라크네의 황홀하고 무례한 베를 격렬하게 찢어버렸다. 아라크네는 여신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결기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아테나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버렸다. "네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 모습 그대로 언제나 매달려 네 잘난 솜씨로 평생 베나 짜라." 이렇게 해서 거미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리스 말로 거미를 '아라크네'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냥 흥미로운 거미의 기원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신화가 현실을 비추는 상징이며 은유인 까닭에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며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먼저, 재능만 믿고 겸손하지 못한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교훈은 아라크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활의 보편적 지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통한다. 또한 권력자와 재벌과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 약자에게 보이는 오만과 전횡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미가 된 아라크네가 어리석다거나 불쌍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거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권력과 재산,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떳떳한 태도, 오직 실력만으로 겨루어보자는 식의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서 우리는 쓰라리지만 한껏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모두 가 윈윈하는 좀 더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와 질서가 무엇일지를 궁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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