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칼럼] 한국경제 사전에 `스피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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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수 칼럼] 한국경제 사전에 `스피드`는 없다

예진수 기자   jinye@
입력 2018-12-25 18:17

예진수 선임기자


예진수 선임기자
전국시대 지략가인 한비자는 "천리가 되는 긴 제방도 개미굴에 무너지고, 백척이나 되는 궁실도 굴뚝 틈새의 작은 불씨로 불탄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밀양시 요양병원 화재 참사를 비롯해 서울 종로 고시원 화재, 강릉 펜션 보일러 사고 등 올해 빚어진 후진국형 안전사고들을 보면 작은 흠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반복됐다. 산다는 것은 온갖 사고와 재난을 요리 조리 피해 나가는 일이라는 한탄까지 나온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정책 하나가 경제를 뿌리째 흔든다. 올 한해 경제를 돌아보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역대급 태풍이 됐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폐업이 이어지고 저임금 근로자 실직 등 고용참사가 빚어졌다. 정부는 24일 국무회의에서 최저임금 산정 기준 시간에 법정 주휴시간을 포함하되 노사 합의로 정하는 약정휴일시간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경영계는 미봉책이라고 지적한다. 경영자총협회는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약정유급휴일에 관한 수당(분자)과 해당 시간(분모)을 동시에 제외하기로 수정한 것은 고용노동부의 기존 입장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경영계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위기에 대한 반성적 진단이 이어지고 있지만, 경제팀이 '결단의 방향 전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만난 한 중소기업인은 "잘못된 정책을 전환하려면 3배 이상의 에너지가 든다"며 "내년 초부터 대혼란이 예고되는 데 경제팀의 대응은 너무 미온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인은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에 따른 기업인들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많은 중소기업인들이 내년 이후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인들은 저성장 절벽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고뇌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불만이다.

내년 4월 이후 주 52시간 근무가 본격 시행되면서 한국경제를 지탱해 온 '스피드 경영 시스템' 강점이 사라지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자동차, 조선, 기계 등의 수주형 생산업종과 연구개발(R&D) 업계 모두 납기를 맞추기 위해 탄력 근로제 확대 적용이 불가피하지만, 경사노위 '조정 방안' 마련은 해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의 빠른 성장은 스피드 경영의 산물이다. 소재와 부품의 경쟁력은 제조업의 버팀목이며 글로벌 밸류 체인과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일본과 중국의 틈새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주요 소재산업의 경우, 주 52시간 근무 시행 이후 직격탄을 맞게 된다.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한국의 소재 생산가격은 일본과 비슷해졌다. 글로벌 주요 시장에서 한국이 중국의 맹추격과 일본의 견제를 이기고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빠른 기간에 납품을 완료하는 순발력이다. 한 소재업체 대표는 "동유럽 생산시설을 수주할 때 경쟁국들이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는 프로젝트를 3개월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더라"라고 말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한국이 다른 경쟁국과 비교해 거의 유일한 비교우위가 스피드"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부품·소재 산업의 탄력 있는 성장이 담보되지 않으면 미래차 시장이나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분야가 위축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강점이 사라지면 한국이 자랑해온 압축 성장이 하루아침에 압축 쇠락으로 바뀔 수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시간관리와 속도는 경쟁력의 제1조건이다. 한국경제의 형식적 고도화보다 더 절실한 것이 스피드의 중요성과 시장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미·중 무역분쟁과 수출 경기 하방 리스크 등으로 곳곳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위기가 코 앞에 와 있는데도 넋을 놓고 있으면 전진은 불가능하다. 지금 경쟁우위에 있는 품목들도 순식간에 경쟁국에 추월당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은 분명한 경제정책 노선을 내세우면서 빠르게 시장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다. 국회에서의 지리한 논쟁과 사회적 합의 기구를 거쳐야 하는 느린 의사 결정 구조로 한국만 오리걸음을 하고 있다. 정책 우선 순위가 정해지면 선택과 집중 원칙 아래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정책관리 역량을 갖추는 것이 '스피드 대한민국'의 저력을 되살려내는 첩경이다.

예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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