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칼럼]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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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수 칼럼]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

   
입력 2019-06-20 18:09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에는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심했다. 오죽하면 망국적이라는 말이 꼬리표로 달려 있었을까. 그런데 최근의 보혁갈등, 이른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 갈등은 과거의 영호남 지역갈등을 넘어설 정도로 극단화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전, 즉 영호남 지역갈등이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이용되던 당시에는 보수의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진보의 논리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새는 양 날개가 있어야 하듯 보수와 진보가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레드 콤플렉스가 희미해지면서 진보가 더 민주적이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확산됐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으로 파면되고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보수를 적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고, 여당 대표가 보수궤멸론을 주장하는 등 보혁갈등이 극단화되고 있는 것이다.
세력이나 집단 간의 적절한 경쟁과 갈등은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지만 과도한 갈등과 대립은 사회구조를 왜곡시키고, 발전의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해질 경우에는 국가와 사회의 분열로 인한 쇠망의 지름길이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혁갈등은 이미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났으며 이로 인한 위기의식이 적지 않다. 이제 과도한 갈등과 분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보혁갈등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보수와 진보의 올바른 자기인식이 확립돼야 하고 둘째, 보수와 진보의 상호 존중이 필요하며 셋째, 보수와 진보가 사안에 따라서는 갈등과 대립을 넘어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초 위에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제대로 자리매김돼있어야 한다.

먼저 전제돼야 할 것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보수는 기존 질서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반면, 진보는 개혁을 통해 더 나은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보수라 하더라도 모든 개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진보 또한 무한정 바꾸기만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로 인해 어느 시대의 진보가 다음 시대에는 보수로 지칭되기도 한다. 예컨대 왕당파와 자유주의자들이 대립하던 시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진보로 분류되었던 반면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던 시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보수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선(善)과 악(惡)의 대립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는 기존 질서의 안정과 개혁을 통한 변화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어느 한쪽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책을 보면, 각자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되 보수당이 앞장서 진보적 정책을 채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여성참정권을 확대해 보통선거를 확립한 1928년 선거법개혁을 들 수 있다.

이제 우리도 보수와 진보를 도식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볼 것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각기 추구하면서도 때로는 선의의 경쟁자로, 때로는 거국적인 협력의 동반자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전체주의적인 '적과 동지의 논리'를 극복해야 망국적인 보혁갈등이 합리화될 가능성이 열릴 것이며, 이는 곧 보수와 진보가 각기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때로는 상대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는 자기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가치이다. 국민의 인권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보수 또는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지, 보수 또는 진보의 주장이 도그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의 교조적 갈등이 강해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새의 양 날개라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툴 경우 그 새는 어떻게 될까? 합리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젖혀두고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심해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날 대한민국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당파적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주장을 했던 전철을 뒤따르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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