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칼럼] 짐싸는 기업인들, 불꺼진 산업단지

예진수기자 ┗ 中 진출 韓기업 "1년째 부진 … 3분기도 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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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수 칼럼] 짐싸는 기업인들, 불꺼진 산업단지

예진수 기자   jinye@
입력 2019-07-09 17:57

예진수 선임기자


예진수 선임기자
최고의 현대 사회학 이론가로 인정받고 있는 탈코트 파슨스는 생물학적 유기체와 인간 사회가 유사하다고 봤다. 파슨스는 이상 증세가 쉽게 회복되지 않고, 되풀이 될 때 그 사회는 병이 들었다고 규정했다. 한국은 속도전에 강하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폭풍처럼 닥친 위기에서는 신속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업이 절벽에 내몰렸던 과정이나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는 자동차 부품산업에서 볼 수 있듯 서서히 밀려오는 위기에는 유난히 취약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현실적 경제정책론을 담은 '경제유표'에서 "만사에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라고 한탄한 바 있다.


지금도 한국은 고비용·저효율 현상의 심화, 제조업 경쟁력 후퇴, 고용의 질 악화 등 각 부문에서 병세가 도져가고 있다. 경제는 생물과도 같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마련해줘야 기업의 야성이 살아난다. 50년 이상 누적되어온 권위주의적 경제운용방식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한국이다. 여기에 반기업정서까지 가세해 투자 의욕은 꺾일 대로 꺾였다. 오죽하면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3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이제 제발 정치가 경제를 좀 붙들어 줄 것은 붙들고, 놓아줄 것은 놓아줄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겠는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에 탑승한 토끼는 산소 측정기 역할을 했다. 잠수함이 심해로 들어가면서 토끼가 졸기 시작하면 산소가 부족해진다는 신호였다. 지금 한계 상황에 내몰린 중소기업들도 남들보다 앞서서 한국경제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현상을 감지하는 토끼들이다. 최근 지방 제조업 밀집지대에서 중소기업들을 만났다는 공기업 직원은 지난해와 달라진 기업들의 반응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금융지원을 위해 만난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정책금융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동남아에 투자하기 위한 방법만 캐물었다"며 "산업공동화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털어놨다.

주요 공단에서 공장의 불빛이 하나 둘씩 꺼지고 있다. 전국 37개 주요 국가산업단지의 고용이 지난 4월 말 기준 99만6347명으로 100만명선을 밑돌았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결과, 최근 10년 간 제조업의 해외 투자 증가율이 국내 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진행되면서 연 평균 4만 2000개의 양질의 일자리가 해외로 유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1분기 한국의 해외직접투자액도 전년동기대비 44.9나 늘어나 1981년 통계 집계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국내 설비투자가 17% 넘게 급감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



기업들은 어지간히 어려운 환경이 닥치더라도 이윤을 낼 수 있다면 투자를 감행한다. 해외직접투자액이 역대급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국내 투자 여건이 최악이라는 뜻이다. 기업들이 인건비가 낮고 노동유연성이 확보된 해외로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이유다. 국내 기업 투자의 공백을 메우려면 외국인 투자가 늘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 1분기 외국인직접투자는 26억2000만달러로 도착 기준으로 1년 전보다 15.9%나 줄었다.
중견기업 최고경영자는 "투자협약을 위해 만나본 외국 기업인들은 그간 중국에 투자하기 위해 중간재 기술이 뛰어난 한국을 거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의 열악한 투자환경 때문에 이제는 곧바로 중국으로 간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국의 장점은 수주 받은 공정에 잘못이 발견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해 주는 점이었다고 외국계 기업 관계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주 52시간근무제 적용이 내년부터 50∼300인 미만 중소기업으로 확대되면 국내외 현장에서 이 같은 장점이 사라질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경기 하강, 일본의 수출 규제까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코 앞에 닥쳐왔다. 기초 체력이 튼튼해야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데, 걱정이 앞선다. 기업들이 속속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조로(早老)현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경제 체력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정세를 뚫고 나갈 슬기로운 외교적 해법이 절박하다. 경제활성화 입법도 화급해졌다. 변덕스럽게 전개되는 대외 삼각 파고를 극복하려면 파격적으로 규제를 풀면서, 획기적 투자·소비 촉진책도 내놔야 한다.

예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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