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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칼럼] 文대통령, 노무현에게 길 물어야

이규화 기자   david@
입력 2019-11-05 18:17

이규화 논설실장





이규화 논설실장
주말에 초로의 전직 밀감 농부를 봤다. 구들 빛 주름이 깊게 패여 흙 내음이 나는데, 뜻밖에 농사를 그만두고 관광해설사가 된 지 꽤 됐다고 했다. 강원도에서도 밀감이 재배되는 마당에 귤나무를 다 캐버리고 사주에 없던 '입 갖고 먹고 사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해방 연간에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셋에 형제가 열다섯이라고 했다. 4·3 사건으로 제주에 남자 씨가 마르자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취해 자신을 낳았는데, 아버지의 둘째 아내가 그의 생모라고 했다. 대개의 경우 손바닥 만한 땅뙈기에 생각(이념)의 차이 때문에 이복 형제자매끼리 멱살 잡고 싸운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함께 사는 길을 선택했다. 얼마 안 되는 땅을 테마공원에 대고 각자 맞는 일을 찾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말을 끊었지만, 유산분배갈등과 정치적 신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밀감농사의 위기가 테마공원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돼 가족의 역사가 바뀌는 우연한 행운을 맞았지만, 변하냐 마느냐는 그들 머릿속에 달린 것이다.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글피(9일)면 새로운 절반 임기를 시작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세력을 생각했다. 끊임없이 편 가르기를 하고 자기만 옳다는 아집에 빠진 그들에게 그의 가족사는 반면교사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해왔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육신은 이별했어도 정신과 가치는 함께 한다"고 했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 쉰 목소리로 노무현의 유명(幽命)을 전하던 모습을 국민들은 기억한다. 그럼에도 말로만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행동은 따로인 지난 2년 반의 모습은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임기 전반은 그야말로 좌충우돌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했다. 취임 이듬해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소추에서 살아 돌아온 임기 후반엔 현실에 눈을 떴다. 노조의 폭력적 시위에 원칙대로 대응하고 무리한 요구를 거절했다. 한미FTA는 남는 장사라는 것을 간파하고 지지층의 결사반대에도 밀어붙였다. 한미FTA 덕분에 우리는 무역과 안보에서 크나큰 혜택을 보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결정은 사실 다음 정권에 미뤄도 될 일이었다. 임기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지지층 이반을 무릅쓰고 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지금 목도하는 것처럼 중국의 패권화를 예견했다. 제주해군기지는 우리 무역로와 해양주권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얼마 전 한국갤럽이 조사한 역대 대통령 호감도에서 노무현은 박정희를 큰 격차로 누르고 1위에 올랐다. 단순히 권위주의를 청산한 대통령이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지도자라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선택한 데 대한 헌사일 것이다. 갈수록 오만·태만·방만 '3만 정권'으로 치닫는 집권세력은 왜 노무현이 다시 각광받는지 곰곰이 새겨봐야 할 것이다. 궤도 수정은 쉽지 않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덧내고 아픈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내가 이기고 저쪽이 저야 한다. 분노로 자신을 가둬버린다. 그런데 전직 밀감 농부의 가족처럼 서로 화 내고 힘 빼기보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택하면 세상은 180도로 달라진다.

노무현 대통령은 겉으론 '반미' '친북'인양 행동했지만, 속은 그러지 않았다. 실은 모두 승자가 되는 길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자로 비난받는 일은 그의 소명의식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는 '사람 사는 세상'에 있었다. 진보도 보수도 낄 수 없는 '이해하고 화해하는 사람'이다. 반면, 문 대통령의 사람은 '계급화된 사람'이다. 폐기처분된 이념을 손에 쥐고 공정과 평화를 외치는 모습은 시대극을 보는 것 같다. 전직 밀감 농부 말처럼 먹고 사는 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에게서 임기 후반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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