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 앙상블서 더 빛나… 실내악단 콩쿠르 도전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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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 앙상블서 더 빛나… 실내악단 콩쿠르 도전 응원"

디지털뉴스부 기자   dtnews@
입력 2019-11-07 18:09

'합주' 실내악의 또다른 이름


사진 백상현(fij 스튜디오)



월간 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비올리스트 최은식을 만나다


슈베르트가 남긴, 지금은 사라진 악기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곡. 오늘날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비올라와 첼로 버전으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쓸 때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잠에 들 때면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아침이 되면 슬픔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인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으면 처연함이 느껴지는데, 두 악기가 가진 슬픔의 농도는 무척 다르다. 첼로 버전을 들으면 마음에 응어리가 터져 나오고, 비올라 버전을 들으면 멍울진 슬픔을 견디는 느낌이랄까. 여하간 첼로와 비올라의 질감은 이리도 다르다.

비올라는 다른 현악기에 비해 오랫동안 고독한 시간을 견뎌왔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소리가 애매하다며 대중은 외면했고, 비올리스트를 보고는 움직임이 둔탁하다며 비웃기도 했다. 악기통이 워낙 커서 비올라 연주자들의 어깨는 굽을 수밖에 없었고, 악기의 반응이 느려서 더 민첩하게 연주한다는 걸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국내에서도 비올라 역사는 다른 현악기에 비해 짧은 편이다. 우리나라 초기 비올리스트로는 김용윤이 있다. 이후 조명희, 오순화, 최은식, 김상진 등이 비올라 계보를 이으며 젊은 비올리스트를 발굴했다. 이들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현재는 많은 비올리스트가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C선의 울림, 묵직이 내려앉다.

비올리스트 최은식은 서울예고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LA 필하모닉 수석 비올리스트였던 오야마 헤이치로를 사사했다. 비올라를 향한 불편한 오해가 있는데, 들어봤는가. 많은 이들은 바이올린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 비올라로 전향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명료하다. 바이올린을 못 하면, 당연히 비올라도 못 할 수밖에. 최은식의 시작도 바이올린이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참 잘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음악시간 때 노래를 잘 부르니 담임선생님이 음악적 소질이 있다며 바이올린을 추천해주셨죠. 하다 보니 재밌는 거예요. 그러다 신동옥 선생님이 저보고 비올라를 권하셨어요.당시 비올라 제자를 키우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남학생이다 보니 신체적으로 비올라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비올라는 퍽 매력적이었다. 특히 바이올린에는 없는 C선의 울림이 마음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서울예고에 입학한 최은식에게 우연히 미국 유학 기회가 주어졌다. 정명훈과 오야마 헤이치로에게 오디션을 받고, 그는 미국 크로스로드 예술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두 손에 비올라를 꼭 쥔 최은식은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내악의 울림, 국내에 퍼지다


오야마 헤이치로는 최은식에게 기본기를 강조했다. 학생들이 철저한 테크닉을 익히도록 엄격히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최은식도 이른 나이에 스승이 됐다. 대학 졸업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98년 귀국하며 서울대 교수로 임명됐다.

"솔직히 말하면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실망이 컸어요. 한국 음악 현장에 관한 실망이었죠. 저는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현악 4중주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음악을 함께 공유할 연주자들이 많이 없었어요. 1990년대 한국 음악계는 솔리스트 위주였고, 실내악은 소외된 장르였습니다."

소외된 악기, 소외된 장르를 하는 최은식은 얼마나 서글펐을까. 그는 미국에서부터 늘 자신이 비올리스트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왔다. 우연히 과르네리 현악 4중주단 리사이틀을 봤고, 베토벤 후기 작품을 연주하는 그들을 보며 무릎을 쳤다.

"비올라의 매력은 앙상블에서 빛이 나더군요. 현악 4중주 한가운데서 음악을 컨트롤하는 악기잖아요. 현악 4중주단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확고한 마음이 생겼어요. 커티스 음대에 진학한 이유도 실내악을 공부하기에 적합한 학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걸요."

그는 보르메오 현악 4중주단에서 활동하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미국은 체계적인 실내악 프로그램이 성했다. 현악 4중주 단원으로 미국에서 활약하던 그였기에, 한국의 음악 환경은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음악 교육계에서 '딴짓'은 암묵적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연주자로서의 갈증이 컸던 최은식은 귀국 후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연주, 그저 연주가 너무 하고 싶다는 간절함. 그가 해방감을 느끼는 곳은 학교 울타리 밖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딴짓'을 모색했다. 한국의 실내악 성장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선 것이다. 실내악이 성장하려면, 실내악을 담는 그릇이 필요하다. 최은식은 2008년부터 저스트 비바체 페스티벌을 운영했다. 페스티벌 시즌마다 그는 실내악을 듣기 위해 해외로 갔는데, 국내에도 그러한 실내악 페스티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초기의 저스트 비바체는 비올라 주자들 중심으로 흘러갔다.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색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악기이지 않은가. 비올라로 구성한 앙상블 사운드도 꽤 괜찮았지만,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국내 연주자들에게 실내악이 익숙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그렇게 시작된 저스트 비바체 페스티벌은 10여 년의 세월을 아로새기며 천천히 성장했다. 2017년부터는 전주 비바체 실내악 축제로 이름을 바꾸고, 매해 전주에서 개최하고 있다.

"전라북도는 한국의 소리로 유명하잖아요. 한국적 분위기가 넘실거리는 전주가 동서양이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놀란 점은 전주에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많다는 거예요. 이번 비바체 실내악 축제도 전석 매진됐습니다."

10년 동안 저스트 비바체 페스티벌은 굳건히 건재했고, 차세대 연주자들의 실내악 경험도 늘어날 수 있었다. '독주를 듣는 귀'와 '실내악을 듣는 귀'는 엄연히 다르다. 젊은 연주자들에게 '실내악을 듣는 귀'가 생기며 우리 음악계는 질적 성장을 이뤘다. 노부스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 아벨 콰르텟 등 국내 실내악단이 해외 콩쿠르에서 우승 소식을 전했다. 최은식은 마음이 참 벅차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를 힘주어 말했다. 이들이 지속 가능한 실내악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젊은 실내악단들이 지속적으로 해외 콩쿠르에 도전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서 다양한 나라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하죠.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실내악은 특별한 장르거든요. 여럿이 한마음이 돼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건 오랫동안 마음이 동할 연주자를 만나야하는 거죠."

글=장혜선기자/사진=백상현(fij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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