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윤정희, 한국영화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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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윤정희, 한국영화의 전설

   
입력 2019-11-12 18:20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문화평론가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 소식이 전해져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윤정희의 남편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백건우가 최근 인터뷰에서 그녀의 근황을 알린 것이다. 현재 윤정희는 때론 자식과 동생을 몰라보고 요리하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로 병세가 깊어졌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이 10여 년 전에 시작됐다는 점이다.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2010년작 '시' 제작 당시 이미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을 맡아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알츠하이머 증세와 싸워가며 혼신의 노력으로 영화활동에 나섰다는 사실이 이제야 알려진 것이다.


윤정희는 한국영화 최전성기였던 1960년대에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데뷔했다. 당시 신진 여배우 기근인 상황에서 1965년에 혜성처럼 문희가 등장했다. 바로 이어 1966년에 남정임이 나타나고, 1967년에 윤정희가 데뷔했다. 이들은 등장하자마자 한국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1968년에만 이 셋의 주연작이 문희 40편, 남정임 58편, 윤정희 50편에 달했다. 불세출의 남배우 신성일과 이 세 여배우가 한국영화 최전성기를 이끈 셈이다. 특히 윤정희와 신성일은 99편의 영화를 함께 해 최고의 청춘스타 커플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문희, 남정임, 윤정희를 일컬어 트로이카라고 했다. 이때부터 최고의 여배우 3명을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 셋의 이미지는 확연히 달랐다. 문희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까웠고 남정임은 깜찍 발랄한 현대 여성 이미지로 각인됐는데, 윤정희의 이미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윤정희에겐 지적이며 예술적인 아우라가 있었고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여러 감독의 혁신적인 작품에 열정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배역이 다양해졌고 그래서 정형적인 이미지 대신에 예술적인 아우라가 형성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시'를 제작할 때 프랑스에 있는 윤정희를 찾아가 섭외한 이유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테다.

영화예술에 가장 깊게 몰입한 여배우도 윤정희였다. 1960년대에 여배우는 젊었을 때 정신없이 수많은 영화를 찍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부유한 배우자와 결혼하며 은막을 떠나는 패턴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윤정희는 예술가와 결혼했고, 결혼한 후에도 영화활동을 이어나갔다.



영화활동을 이어나가긴 했는데 계속 충무로 시스템의 관성에 머문 것은 또 아니다. 1974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윤정희는 영화와 연기를 더 공부하겠다는 소감을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이렇게 스타의 자리에서 진지한 배움의 길을 선택하는 건 특별한 열정이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유학을 떠나 9년 여간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영화는 계속해서 찍었다. 이때 남편인 백건우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렇게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스크린에 남겼다. 보통 스타의 자리에 집착하는 사람은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사람들 기억에 남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청춘기를 스크린에 박제하고 영화계를 떠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연기 그 자체가 중요한 배우는 연륜을 연기에 담으며 주름살이 늘어가는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윤정희가 바로 그랬다. 그런 열정으로 그녀는 대종상 등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24차례 수상했다. 상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을 받은 시기다. 그녀는 놀랍게도 20대, 30대, 50대, 60대 등 전 생애에 걸쳐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희귀한 배우다. 또 다른 희귀한 기록은 대표작이 최근작이라는 점이다. 점점 연륜이 쌓이고 원숙해져 66세에 찍은 '시'를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당시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가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칸이 여우주연상으로 선정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드러냈는데, LA 비평가 협회가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헌정했다.

백건우는 내년에 슈만의 곡으로 연주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슈만의 곡엔 부인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담겼다. 한 평생을 함께 한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인 윤정희에게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이 부부의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는 지금 시점에 윤정희의 병세를 공개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 병을 알리면서 엄마가 (팬들의) 그 사랑을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지금 엄마에게 그게 정말 필요하다"며 대중이 윤정희를 응원해주길 기대했다. 윤정희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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