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정치, 참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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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정치, 참 나쁘다

김미경 기자   the13ook@
입력 2019-12-02 18:24

김미경 정경부 기자


김미경 정경부 기자
정치, 참 못됐다. 가까이서 정치의 민낯을 보면서 갑갑하고, 분노하고, 허탈하고, 안타까워 한 일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상처받은 것은 처음이지 싶다. '민식이법'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비공개로 회동을 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단식농성으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협상이 멈추자 작은 실마리라도 풀어보자고 모인 자리였다. 협상을 시작하기 전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모임 장소로 갔더니 뜻밖에 먼저 와 있는 분들이 있었다. 바로 고(故) 김민식 군, 고(故) 이해인 양, 고(故) 김태호 군 등 교통사고 등으로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님들이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민식이법', '해인이법', '태호·유찬이법' 등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국회까지 오신 듯 했다. 이 법안들은 모두 어린이 교통안전 등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식이법'은 어린이 보호구역 내 신호등과 과속단속 카메라 설치 의무화 및 구역 내 교통사고 사망 발생시 가중처벌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뜻한다. 지난 9월11일 충남 아산의 어린이 보호구역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민식군의 이름을 붙였다. 해인이법은 어린이 안전사고 피해자의 응급처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2016년 4월 당시 4세였던 해인 양이 어린이집 하원길에 차량에 치어 숨진 뒤 어린이집 측의 응급대처가 미흡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같은 해 8월 법안이 발의됐으나 3년이 넘도록 국회에 계류 중이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회동 장소로 들어가려던 오 원내대표와 나 원내대표, 뒤이어 도착한 이 원내대표를 붙잡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 제발 우리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제발 법안을 처리해달라고…. 오열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십수년 기자생활을 하면서 현장에서 눈물이 났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회에서 눈물을 보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당황했다.



잠시 추스르고 보니 원내대표들이 부모님들의 요청을 진중히 들으며 "꼭 처리하겠다" 약속을 하고 있었다. 나 원내대표는 "(부모님들을 국회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하다. 당연히 (처리)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며 "안 그래도 법안 처리가 오랫동안 안 된 부분이 있어서 (29일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저희도 이런(어린이 교통안전)법안은 더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 원내대표도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라며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부모님들은 이튿날인 27일에도 국회를 다시 찾아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에게 무릎까지 꿇고 법안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정치의 약속은 허망했다. 지난달 29일 한국당은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법안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했다. 뒤늦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민식이법' 등은 필리버스터 대상은 아니었지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당은 필리버스터를 신청했고, 민주당은 본회의를 포기했다. '민식이법'과 '해인이법' 등은 여전히 국회에 묶여 있다. 부모님들은 29일 또다시 국회에 와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안처리를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국회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나 원내대표의 사과가 공허해졌다.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한국당은 "민식이법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지 않았다"며 방패막을 세웠다. "본회의를 막은 것은 여당"이라고 책임을 민주당에 돌리기도 했다.

여당인 민주당도 물론 본회의 무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본회의가 마비될 것을 충분히 예측했으면서도(몰랐다고 한다면 더 몰염치하다) 무려 199개 법안, 그것도 유치원 3법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야 합의처리가 된 민생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한국당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필리버스터는 모든 정당이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전략이다. 필리버스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당이 목숨 걸고 막으려고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안은 아직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않았는데 필리버스터 카드를 왜 하필 29일 본회의에서 성급히 쓴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것뿐이다. 원포인트 본회의를 열자고 여야가 협상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의심이 앞선다. '민식이법'은 여야 정쟁의 흥정거리가 됐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들의 부모와 민심의 상처를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상처를 헤집어팠다. 정치, 참 나쁘다.

김미경기자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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