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無信不立` 국가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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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無信不立` 국가 만들자

이준기 기자   bongchu@
입력 2020-01-22 18:32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지난 주말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과 천재과학자 '장영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를 봤다. 과학기술을 다룬 국내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딱딱한 과학적 소재를 두 주인공이 어떻게 풀어내고,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 지 한껏 기대감을 갖고 극장을 찾았다.


영화 '천문'은 당초 예상과 달리 과학기술 소재를 다룬 영화이기 보다는 명나라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두 주인공의 깊은 신뢰와 우정, 애틋한 감정을 다룬 소위 '브로맨스' 소재의 영화였다.
영화는 세종과 장영실은 왕과 관노라는 당시 엄청난 신분 차이와 주변 대신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요즘말로 '100% 국산화'에 성공한 토종 자격루(해시계)와 간의(천문관측기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재해석했다. 여기에 믿고 보는 국내 최고의 배우인 한석규(세종 역), 최민식(장영실 역)이 주인공을 맡고, 섬세한 미장센 연출로 정평난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이 메카폰을 잡아 개봉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관람했다고 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

과학기술계 역시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자이자 발명가였던 장영실을 소재로 한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과학기술 관련 영화라는 점에서 한껏 기대감을 드러냈다. 영화 '천문'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보다 많이 알리고,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믿음을 재차 확인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이를 기반으로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삶의 질 향상과 행복 실현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과학기술로 보답하겠다는 약속도 은연 중에 내비쳤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하듯 지난해 12월 말 대전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는 정병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과 김성수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등 과학기술 고위 관료와 일선 현장의 연구자들이 대거 얼굴을 비쳤다. 영화 '천문'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지대한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종과 장영실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같은 꿈을 꿨고, 이를 이루기 위해 명나라와 조선 사대부들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된다. 그 이면에는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장영실이라는 인재를 알아보고, 관노에서 대호군(종3품)으로 등용해 곁에 두고, 깊은 신뢰와 우정을 이어온 세종의 리더십과 안목이 자리하고 있다. 장영실도 이런 세종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밤을 세워 가며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명나라보다 우수한 자격루, 간의, 혼천의 등 당대 최고의 발명품을 개발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5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현실은 어떨까. 무엇보다 국가 리더와 과학기술인들이 세종과 장영실 관계처럼 두터운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연구 현장에 있는 과학기술인들을 만나보면 정부에 대한 신뢰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국민과 과학기술인 사이에도 신뢰의 벽이 여전히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싼 국가, 과학기술인, 국민을 이어주는 신뢰 형성의 가치 사슬이 제각각이고, 단절돼 있다는 느낌은 과학기술 분야를 취재하면서 자주 체감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정책 수요자인 현장의 과학기술인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냥 연구비 몇 푼 주면서 우리를(과학기술인)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집단으로 여긴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한 해 20조원이 넘는 국가 R&D 예산을 지원해도 연구비를 횡령·유용하거나, 연구부정을 저지르며 남을 헐뜯으며, 투자 대비 성과가 없는 '잘난 사람이 모인 집단'으로 폄하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국민 역시 이런 국가와 과학기술인을 '그들만의 리그' 속에 허우적거리며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 이해와 공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2020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지만, 국내외 안팎으로 갈수록 국가적 어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영화 '천문'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신불립'(無信不立)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든 국가든 존립하기 어렵다. 촛불민심을 통해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국민 통합보다는 진영 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결국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믿지 않고, 신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번 정부가 줄기차게 부르짖고 있는 공정, 혁신, 포용 등의 근간에는 신뢰가 자리잡고 있어야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금이라도 양쪽으로 가라진 국민들의 신뢰 회복을 위해 영화 '천문'의 세종처럼 실력 있는 인재가 정치적 이념과 성향이 아닌 능력과 역량에 따라 공정하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사회 건설을 위한 정부의 담대한 행동이 필요한 때다.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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