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자본주의 덕을 본 영화들

메뉴열기 검색열기

[시론] 자본주의 덕을 본 영화들

   
입력 2020-02-19 20:10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영화 '기생충'이 지난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4부문에서 왕관을 차지했다. 지난해 5월에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선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수상 내역이 말하듯이 한국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모든 예술 작품에는 작가가 독자나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나 관객들의 것이 된다. 따라서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느끼고 해석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나 관객들의 소관 사항이다. 예술성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영화를 보고 느끼며 해석하듯이 말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열차의 각 객실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물적 환경에도 큰 차이가 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꼬리 칸의 승객들이 가장 잘 꾸며지고 안락한 첫 칸으로 진입하고자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객실 간에 존재하는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어야 한다. 한 두 명이 진입에 성공하지만 그동안에 대부분은 죽는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설국열차'는 사회주의 참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터무니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객실 간의 차이를 빠른 속도로 줄여주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그런 격차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난의 일상 속에서도 그나마 빈부 격차가 좁혀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그 격차가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독재권력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은 빈부 격차에 따른 부자와 빈자의 삶을 다룬다.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이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評)은 빈부 격차에 직면한 오늘날의 자본주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점도 새길만하다. 그러나 빈부 격차의 원인이나 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딱딱한 주제이거나, 관객의 감성을 깨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있다. 그런데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발아와 함께 기술과 교환 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은 놀랍게 향상되었다. 요즈음 일반인들은 예전에 왕이 입었던 옷이나 먹었던 음식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

자본주의는 이전에 인류가 겪었던 물질적 결핍의 많은 부분을 해결해왔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자원의 희소성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자원이 희소하지 않다면 사람들 간의 자유와 평등, 정의와 불의, 공정과 불공정, 빈부격차 등의 개념은 모두 증발해버린다. 인간 세상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를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자본주의가 빈익빈 부익부로 특징지어진다는 언설은 요설(妖說)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능력에 따라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고 부자도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체제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의 터전을 가꿀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래서 '기생충'의 메시지는 남에게 기생하여 살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등 따습고 배불러야 예술도 꽃필 수 있다. 자본주의가 쌓아올린 부(富)를 바탕으로 빛나는 예술이 나올 수 있으며, 예술인들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은 바로 그런 한국 자본주의의 덕을 톡톡히 본 영화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한 화제작이라고 공감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예술이 독자나 관객들이 오감으로 느끼며 감상하는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떠받치는 사실의 진위(眞僞)를 따지기 위해 사고하고 추론하는 것은 여전히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