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DT현장] 국민연금, 딴전 피우지 말라](http://contents.dt.co.kr/images/202002/2020022002152269781001[1].jpg?var=0956 "[DT현장] 국민연금, 딴전 피우지 말라")
국민연금이 지분투자한 한 기업의 팀장급 직원은 최근 회사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한 시민단체의 모습을 보며 이 같이 말했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 실적도 좋아졌고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도 그 혜택을 봤을텐데 왜 자꾸 기업을 흔드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하소연이었다. 정기 주주총회가 임박하면서 국민연금에 대한 기업들의 불만이 높아져가고 있다. 특히 최근 시민단체들이 직접 해당 기업까지 찾아가 국민연금의 경영개입을 압박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직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따름이다.
사실 직원이라고 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의 총수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뒷담화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국민연금이 해당 총수를 뒤흔드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외부인이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뒤흔드는 것을 좋아할 직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람의 심리도 담겨있다. 현재 총수의 경영 능력을 떠나 이미 겪어온 사람이라면 일단 불확실성은 없다. 하지만 대안 없는 변화는 능력 없는 총수를 모시는 것보다 더 불안한 것이 사람 심리다.국민연금 또는 시민단체에 대한 기업 직원들의 불만은 총수의 잘잘못을 떠나 외부인이 왜 우리 회사를 흔들려고 하느냐는 반발에서 시작한다. 열심히 일해서 실적을 높였고, 국민연금은 덕분에 수익을 높였는데도 왜 우리 회사에 개입하느냐는 생각이 담겼다.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 행사를 압박한 효성과 삼성물산 등의 실적과 주가는 모두 1년 전과 비교해 나아졌다. 효성의 경우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선택과 집중'으로 수익성을 개선했고, 그 결과 3년 만에 영업이익 1조원을 재탈환하는 좋은 실적을 거뒀다. 주가 역시 작년 말 기준으로 전년 동기보다 50% 가량 상승했다. 삼성물산의 경우 실적 부진에도 배당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고, 주가도 1년 전과 비교해 10% 가량 오른 만큼 국민연금에 보탬이 됐다. 양쪽 다 총수의 경영참여 비중이 높은 회사다.
그럼에도 시민단체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와 민주노총,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등은 지난 5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열린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효성, 대림산업, 삼성물산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인 정상영 변호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물산에 손해인 합병에 찬성해 국민연금에 손해를 입힌 이사들이 아직도 삼성물산에 남아있다"며 "국민연금은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훼손한 기업의 구조를 개선할 힘이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역시 국민연금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상장사 56곳에 대해 '단순투자' 목적에서 '일반투자' 목적으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주주활동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정부가 상법과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며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참여의 기반을 만들었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본연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다. 일본공적연금기금(GPIF), 노르웨이국부펀드(GPFG), 네덜란드공적연금(ABP), 캐나다공적연금(CPP) 등 외국 주요 연기금의 5년 평균 수익률이 4.4%에서 10.7%까지 높은 편인데 비해 국민연금은 단 4.2%에 불과하다. 지난해 두자릿수 성장률로 깜짝 성적표를 내긴 했지만, 직전 연도에는 손실을 기록하는 등 아직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고령화에 따른 연금보험료 지출 증가로 국민연금이 바닥날 것이라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 적립금은 700조원을 넘고 공적연금 기금 규모로는 세계 5위 수준에 이르지만, 국회예산정책저는 2054년이면 국민연금이 바닥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민연금에 보험료를 내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노후 연금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고, 이를 위해서는 국민연금이 안정적인 수익성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측 인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의 구성 상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경제단체들은 총수 등 기업의 잘못은 법으로 처벌하면 될 문제이지,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로 개입할 상황은 아니라고 반발하고 있다.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국경제연구원 등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기업의 위법 행위는 관련법으로 처벌하면 된다"며 "정부가 나서서 국민연금을 이용해 기업들을 제재한다는 발상은 기금설립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본질은 정부가 국민의 노후 저축자금을 대신 운용해서 수익률을 내주는 것"이라며 "정부가 공적경제라는 명분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내세워 사회적 책임이나 공공성을 강화하라고 주문한다면 기업들은 건전성이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한진가(家) 경영분쟁 등 이미 재계의 지각변동은 굳이 국민연금이 개입하지 않아도 현재진행형이다. 다른 기업들도 정부의 재벌 압박에 투명경영 강화와 일자리 창출, 내수시장 활성화 등으로 호응하고 있다.
사실 정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총수 흔들기나 기득권 뺏기가 아니라 아니라 경제를 살려 모두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만약 총수의 존재가 경제에 해가 되고 모두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지장이 있다면 이를 막아야겠지만, 총수가 더 이득을 봤으니 이를 뺏어 국가가 나누겠다는 발상은 자칫 시장 자본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한때 한 영화에 나온 "너나 잘 하세요"라는 대사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기업을 더 좋게 변하게 하고 싶으면, 정부가, 그리고 국민연금이 먼저 눈과 귀를 열고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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