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탁의 탁견] 상하이 최초 `일본군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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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탁의 탁견] 상하이 최초 `일본군위안소`

   
입력 2020-08-13 18:47

이우탁 연합뉴스 전문기자


[이우탁의 탁견] 상하이 최초 `일본군위안소`
이우탁 연합뉴스 전문기자
해마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상하이(上海)의 일본군 위안소가 생각납니다. 2005년 여름이었습니다. 하루는 상하이사범대학 역사학과 쑤즈량(蘇智良) 교수 쪽에서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취재를 해보겠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상하이 특파원으로 오기 전 외교부 담당 기자를 할 때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천착해왔지만 '최초의 위안소'가 중국 상하이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궁금했습니다. 즉각 쑤 교수팀과 '현장 탐방'에 나섰습니다.


저희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상하이시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 125 롱(弄)에 있는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왠지 낯설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가 일어난 루쉰(魯迅)공원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윤 의사 의거 당시 이 지역은 일본 조계지에 속했습니다. 쑤 교수는 2층 건물을 지칭하며 '따이살롱(大一沙龍. Daiich Saloon)이 있던 곳이라 했습니다. 그때도 상하이시 재개발 바람이 거셌는데 다행히 건물 기본구조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일본군 고급 장교들을 위한 위안소답게 작은 일본식 정원까지 갖추고 있었고, 집안 내부에는 넓은 로비와 미닫이 창문, 일본식 바닥 문양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눈 덮인 후지산 조각 장식이 벽에 그대로 걸려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층과 2층 곳곳에 마련된 40여개의 좁디좁은 쪽방은 위안부들의 '공간'입니다. 70여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1924년 출생해 인근에서 계속 살았다는 중국 노인이 귀띔해줍니다. 이 노인은 "어렸을 때 겁이 나서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집 안에 있는 여자애들은 전부 일본전통 복장을 하고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따이살롱 인근에 있는 '메이메이리(美楣里) 위안소' 건물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일본군 해군 사병들이 주로 가던 집단 위안소였다고 합니다. 개미굴 같은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가녀린 자들이 손짓하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쑤 교수는 상하이에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들어선 배경을 소상하게 전합니다. 과거 러일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군은 7개 사단의 병력을 출전시켰지만, 무려 1만명이 성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는 '전투력 보호'를 위해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상하이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상하이를 중국과 동남아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습니다. 일본 해군병력과 육군병력이 1931년부터 차례로 상하이에 주둔했습니다. 여기에 위안소를 세운 겁니다.

상하이 훙커우 지역에 당시 일본 해군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따이살롱이 바로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로 확인됐다고 쑤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따이살롱과 그 주변에 일본군 장병들을 위한 위안소가 대규모로 들어섭니다. 1937년 난징 대학살 이후 일본군 위안소가 더 체계적으로 확대됐고, 1941년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싱가포르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위안소가 설치된 겁니다.

따이살롱은 1945년 8월 일본 패망까지 운영했는데 일본 민간인이 사장으로 있었지만, 실제 관리는 일본군이 직접 맡았다고 합니다. 쑤 교수 등의 노력으로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훙커우 지역은 물론이고 황푸(黃浦)강 건너 푸둥(浦東), 그리고 조금 외곽지역인 충밍(崇明), 우송(吳淞), 자팅(嘉定) 지역에도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 대부분 20~29세인 위안부 여성들은 일련번호를 부여 받고 작은 쪽방에 기거하며 감금과 폭행에 시달리는 등 지옥 같은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위안소 설치 초기에는 일본에서 데리고 온 위안부들이 기거했으나 일본군의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 자행으로 주둔 일본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위안부가 부족해지자 조선 여성들을 대거 끌어들이거나 현지 중국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동원했습니다.


쑤 교수는 자신이 직접 확인한 '조선 위안부' 얘기도 전했습니다. 이 여성(하순임이라고 했으나 확인 불가)은 19살 때 상하이에 가면 '큰돈을 번다'는 말만 믿고 배를 타고 상하이에 왔는데,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도망친 적도 있었으나 금방 잡혀 왔고, 매를 호되게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쑤 교수에게 상하이 일본군 위안소의 존재를 어찌 알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1992년 3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만난 한 일본학자가 '일본군이 설치한 첫 번째 군대 위안소가 상하이에 있다더라'는 얘기를 해왔다. 귀국 후 곧바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조사를 깊이 할수록 놀라고, 또 놀랐다. 처음에 몇 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위안소의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149곳의 위안소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2005년 봄 '상해일본군위안소실록(上海日本軍慰安所實錄)'이라는 책에 펴냈습니다.

실록 출간을 2005년에야 한 이유를 묻자 "한 일본군 출신이 용기를 내줘 증언을 해줬다. 상하이 주둔 일본군의 전령이었는데, 자신이 겪었던 내용을 솔직하게 전해줬다. 대신 '내 증언은 사후에 공개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본 군인은 2003년 세상을 떴습니다.

쑤 교수는 일본 군인의 증언이 상하이 위안소를 찾는데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당시의 흔적을 기록한 쑤 교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간 위안부들의 실체를 세상에 공개해야겠다는 각오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과 더욱 활발한 교류를 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보다 확실하게 규명하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마지막으로 한 대목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쑤 교수가 건네준 연구자료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군 위안소의 간판을 정리해 놓은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리랑'이나 한국의 유명 지명을 딴 위안소(주점)가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 자료에는 이 위안소를 운영한 '조선인'들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까지 적시돼있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젊디젊은 조선의 여인들이 짐승처럼 사는 동안 같은 피를 나눈 조선인들이 그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화난 표정을 짓자 쑤 교수는 일부 상하이 거주 조선인들이 일본군 밑에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고증했다고 담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일본군 패망 이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삶에 관해 얘기합니다. 위안부들은 일본군들이 떠나면서 자유를 찾았지만 그들의 육체와 정신세계는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주홍글씨는 그녀들을 또다시 지옥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고 살았습니다.

1991년 8월 14일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라는 피의 증언으로 비로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큰 울림을 주는 이슈가 됐습니다. 어느덧 광복 75주년입니다. 상하이 위안소는 고통스러운 역사의 증언입니다. 언제까지 '슬픈 기억'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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