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청산리대첩 영광과 경신참변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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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청산리대첩 영광과 경신참변 아픔

   
입력 2020-10-12 18:43

이희용 연합뉴스 전문기자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청산리대첩 영광과 경신참변 아픔
이희용 연합뉴스 전문기자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삼도구 청산리.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곳이다. 국가보훈처 지원과 연변 조선족자치주 협조로 2001년 이곳에 세워진 높이 17m 60㎝, 너비 25m 크기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뒷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전략)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 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 지역 반일 무장투쟁 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반일 민족 독립운동을 추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청산리대첩은 '일군무적'(日軍無敵)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 내지 전국 각 민족 인민의 항일 투지를 지대히 고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위풍을 추풍락엽처럼 쓸어버렸거늘…(후략)"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독립 열기가 한껏 높아지자 중국 만주에는 만세 시위에서 벗어나 무장투쟁 노선을 따르는 독립운동 세력이 집결했다.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와 사관연성소가 세워지고, 10여 개로 갈라져 있던 독립군 부대도 연합해 규모를 키웠다.

국내 진공작전도 활발하게 펼쳐지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려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1920년 6월 6일과 7일 봉오동에서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부대에 대패했다. 봉오동전투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군은 대규모 부대를 편성했다. 함경북도 나남의 19사단 대부분과 서울 용산의 20사단 일부, 러시아 연해주에 주둔하던 부대까지 2만5000명의 토벌대를 동원했다. 당시 만주의 실력자인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일본군의 만주 진출을 불허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국인 마적단 두목을 사주해 훈춘(琿春)의 일본영사관 방화 약탈 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구실로 삼아 병력을 출동시켰다. 만주의 자국민을 보호하고 마적단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10월 초 출병해 마구잡이로 한인들을 살해하고 당초 목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이범석 장군과 부대를 나눠 청산리 백운평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10월 21일 이곳을 지나는 일본군 5000여 명을 궤멸시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밤새 갑산촌으로 이동했다가 일본군 기병대가 천수평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튿날 새벽 기습했다. 이도구 어랑촌에 있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도 21일 밤부터 22일 아침까지 게릴라전으로 일본군 수백 명을 공격했다.

최대 승부처는 일본군 5000명과 독립군 2000명이 격돌한 22일 어랑촌 전투였다. 하루종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이 승리를 거뒀다.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는 23일부터 25일까지 소부대로 나눠 이동하면서 맹개골과 만기구, 쉬구, 천보산 등지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25일 밤부터 26일 새벽까지 이어진 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6일간의 대전투는 막을 내렸다.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비롯해 1257명이고 부상자는 2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중국의 랴오둥(遼東)일일신문과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일본군 20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했다.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사상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00여 명이었다고 한다.독립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으로 집계했다. 전투에 참여한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 '우등불'에 전사 60여 명, 실종 200여 명, 부상 90여 명으로 기록했다.


독립군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독립군이 지형을 잘 알고 미리 준비를 한 반면 일본군은 독립군을 만만하게 봤다. 당시 독립군은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박격포와 기관총 등 고성능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제국 식민지였던 체코는 1차대전 때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에 투항해 동맹군과 싸웠다. 오스트리아의 패전은 조국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후 러시아 내전에 휘말린 체코군단이 배로 귀환하려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여비 마련을 위해 무기를 독립군에 판 것이다.

독립군의 높은 사기와 동포 주민들의 헌신적인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우등불'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됐다. 굶주림을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서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동포 주민들의 눈물겨운 지원은 독립군 장병들의 사기를 더욱 높였다. 행군 도중 오발 사고로 전우를 죽게 만들어 사형수가 쓰는 용수를 쓰고 참전한 한 병사는 죽은 전우 몫까지 대신한다며 적진 깊이 뛰어들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기관총부대 중대장 최인걸은 기관총 사수가 숨지자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은 뒤 고지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해 180도 회전하며 총을 난사하다가 실탄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일본군은 청산리 패전 앙갚음으로 인근 마을을 돌며 동포 양민들을 학살했다. 1920년 경신(庚申)년에 일어났다고 해 이를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10월 30일 용정촌의 기독교마을 장암동에서는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만주판 제암리 학살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만주에 사는 한인 3693명이 학살당했고 민가 3288채, 학교 41개교, 교회 16곳이 불에 탔다.

흔히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중국동포 가운데는 청산리전투에서 피를 흘린 부대원들의 후손이나 독립군을 도왔다가 일본군의 만행에 희생된 주민의 후손도 있다.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승리의 영광만 기억하고 독립유공자들만 추모할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동포들의 헌신과 희생을 떠올리며 조선족 동포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이희용 연합뉴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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