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메뉴열기 검색열기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입력 2021-07-19 20:14

중앙유라시아만의 독특한 동맹구조
유목집단간 보호·협조 정치적 담보
몽골제국 인질들 군주친위대로 삼아
인질됐지만 왕족·귀족 극진한 대접
주요 인사 딸과 혼인해 친밀감 높여
인질보낸 나라도 정치적 옵션 행사
우리도 신라·고려·조선까지 이어져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중앙유라시아 전통의 인질 외교에서 볼모들은 예상과 달리 환대를 받았다. 일러스트=윤소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소현세자가 인질 생활을 한 심양의 청나라 고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오스만제국의 인질이었던 몰다비아 왕자 칸테미르의 초상.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중앙유라시아 고유의 외교문화(3)

한반도와 북방 지역의 문화적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중앙유라시아 전체에 공통된 관습과 풍습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중앙유라시아인들의 관념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적 행위들이 집단적으로 인정받고 공유되면서 독특한 관습·풍습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그간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중앙유라시아의 사회·문화적 관습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중 정치 관행 내지는 제도화에 이른 것들은 한반도의 우리 민족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은 먼저 중앙유라시아의 외교 관습인 '인질 외교'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북방' 지역, 즉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생각해보면 다른 정주문명 지역에 비해 '야만적'이라든가 아니면 문화적으로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오해할 때가 있다.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만의 독특한 문화적 산물이나 사회 제도에 관해 아직 연구가 미진할 뿐 함부로 그들의 문화가 없었다던가 열등했다던가 평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중앙유라시아 사회를 관통하면서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사회 제도나 관습, 특히 정치 제도를 분석하던 중 중앙유라시아의 독특한 '인질 외교'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국제관계를 언급할 때 지역 단위의 국제 질서와 국가 관계를 규정하는 규범이나 규칙들을 떠올리게 된다. 현대적인 국제관계는 16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형성된 "병립하는 국가가 대등한 자격으로 일정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국제사회'라는 질서"를 갖춘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국가간의 관계는 국가 주권 개념, 국제법 원리, 그리고 세력균형 정책 등의 유럽적 관념에 기반을 둔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른바 '조공체제' 혹은 '책봉체제'라는 관습을 통해 국가간 외교관계가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규정한 '화이질서'에 주변국들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조공체제'라는 게임의 룰에 따라 그들의 상호관계를 풀어갔다.

서아시아에서는 알라와 무함마드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슬람의 세계' 즉 다르 알 이슬람(Dar al-Islam; 직역하면 '이슬람의 집')과 비이슬람적 세계 또는 '전쟁의 세계' 즉 다르 알 하르브(Dar al-Harb)의 구분이 외교 관계의 기본개념이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페르시아-아랍, 그리고 유럽의 문명권을 제외한 나머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해당하는 중앙유라시아, 즉 북방 지역에서는 어떠한 외교적 질서가 존재했던 것일까? 역사 자료를 살펴보면 중앙유라시아 국가들 사이 '질자(質子)' 즉 군주의 아들을 인질로 삼는 방법을 통해 외교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질 외교'는 중앙유라시아 고유의 정치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창업군주의 씨족이 중핵이 되어서 인근 씨족들과 연합하고 이어 언어나 문화가 비슷한 인근 부족을 규합한 결과 유목국가가 출현한다. 지배 씨족 혹은 부족은 보호와 부(富)의 분배를 제공하고, 동맹 씨족과 부족은 군사 협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씨족과 씨족 사이, 부족과 부족 사이에는 정치적인 약속이 맺어지는데, 이를 담보할 수단이 바로 씨족이나 부족의 자녀를 인질로 잡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인질 외교'의 조건은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원 유목 생활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집단들은 언제든 이동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목 집단이라도 여름의 하영지와 겨울의 동영지가 대체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거나 타국의 핍박을 받을 경우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옛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치 집단은 다른 집단의 정치적 복속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보다 지도자의 자녀를 인질로 잡아 갑작스레 타지로 이주하는 것에 대비했다.

한편 중앙유라시아 국가의 군주들은 예하 씨족, 부족들의 충성심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동맹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계약 관계였기 때문에 언제든 반란을 일으키거나 이합집산을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목 국가의 군주는 유력 씨족이나 부족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친위조직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인질로 보내온 타국의 왕자나 귀족 자제를 측근에 두고 주야간 자신을 경계하는 숙위(宿衛)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인질 외교'의 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포함한 역사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질 외교'의 실체가 가장 잘 묘사된 것은 중앙유라시아의 두 국가 흉노(匈奴)와 월지(月氏)의 패권 투쟁 과정에서였다. 흉노의 군주였던 선우(單于)가 새로운 왕비를 통해 왕자를 얻자, 묵특(冒頓)이라는 큰 아들을 적국이었던 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켜 월지의 손에 그를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묵특은 월지를 탈출하여 흉노로 돌아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單于)가 된다. 그 후 자신을 볼모로 삼았던 월지를 공격하여 패배시킨다.

한편 흉노와의 패권 다툼에서 패퇴한 월지(月氏)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지만, 그 곳에서 '인질 외교'를 이어간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북부를 장악하여 쿠샨(Kushan) 제국을 건설하고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쿠샨 제국의 카니슈카(Kansihka) 1세의 위세가 지금의 중국 신장(新疆) 지역에서 황하(黃河) 이서까지 이르렀고, 이 지역 대부분 국가에서 왕자들을 쿠샨 조정에 볼모로 보냈다고 한다.

중앙유라시아의 '인질 외교'의 관습은 인근 정주 국가, 특히 중국에도 전해졌다. '사기'에 따르면 연(燕)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로 명명된 북방 민족에 인질로 잡혀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귀국한 이후에는 병력을 동원하여 동호(東胡)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한다. 인근 조(趙)나라 역시 중앙유라시아 민족들과 외교 관계를 통해 '인질 외교'를 받아들여 훗날 진(秦)나라 장양왕(莊襄王)이 된 왕자 이인(異人)을 볼모로 삼기도 했다.

중앙유라시아의 민족들이 북중국을 장악하던 오호십육국-남북조 시기를 지나 건국된 당나라 조정에서는 적극 중앙유라시아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인질 외교' 풍습도 시행되었다. 당나라 태종은 돌궐(突厥) 제국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천가한(天可汗)을 자칭하면서 많은 돌궐 부족의 수령들을 자신의 '숙위'로 삼았다. 이러한 당나라 조정의 '인질 외교'에 신라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었던 김인문(金仁問)과 김문왕(金文王) 등 왕자들이 사찬(沙飡) 유돈(儒敦) 등 귀족들과 함께 당나라 황제의 숙위(宿衛)로 복무했다.

몽골제국 시기는 이러한 인질-숙위(宿衛) 제도가 가장 발달한 시기였다. 각국의 왕자나 유력 왕족을 케식(Keshig)이라고 불리는 몽골 군주의 친위대로 삼았다. 케식 집단에서 이들 왕자나 왕족들은 특별한 교육을 통해 몽골의 습속을 익히고 몽골 군주와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중에 귀국해서 친몽골계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인질 외교'의 풍습은 몽골제국 이후 중앙유라시아 전통을 받아들인 유라시아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는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오스만에 복속한 몰다비아(Moldavia) 공국의 왕자 디미트리예 칸테미르(Dimitrie Cantemir)는 1688년 15세의 나이로 이스탄불에 볼모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 정교회 소속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을 뿐 아니라 저명한 오스만 학자들에게서 오스만투르크어, 아랍어, 쿠란 강독을 통한 이슬람 신학을 배웠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1711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루마니아 침공이었다. 몰다비아가 신흥세력인 러시아의 편에 서자 오스만 제국은 역습을 펼쳐 몰다비아를 점령했고, 그 결과 몰다비아의 왕자인 칸테미르는 러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 수도에서 쌓은 무슬림 세계에 대한 학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사회에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1714년 베를린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고, 그가 출판한 일련의 저작물은 몰다비아, 루마니아 뿐 아니라 오스만 사회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인식을 일깨웠다.

그런데 이렇게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지속된 '인질 외교'는 단순히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고 나름의 다이내믹을 갖는 외교술이었다. 먼저 인질을 받은 나라는 볼모로 제공된 왕족이나 귀족의 일원을 극진히 대접했다. 많은 경우 자국의 주요 인사의 딸과 혼인시켰다. 이렇게 인질로 파견된 인사는 인질로 간 나라의 문화를 익혀 그 나라에 친숙해졌다. 특히 군주를 밤낮으로 호위하는 숙위(宿衛)로 삼아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마음 속에 새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경우 그 인질은 본국에서 인질로 있었던 나라에 친밀감을 갖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반대로 인질을 보낸 나라의 경우에도 다양한 정치적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인질로 보낸 왕자는 일종의 특별대사와 같았다. 그와 강대국 군주 사이 개인적인 친분을 쌓음으로써 강대국 측에 자국의 의사를 적극 피력하고 보다 유화적인 정책이 나오도록 노력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사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약소국의 군주는 자신이 제거하고 싶은 왕자나 또 다른 정치적 유력자를 볼모로 보낸 후 전쟁을 벌여 손쉽게 제거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민족의 '인질 외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259년 오랜 항몽기간을 끝내고 몽골 측에 투항한 이래 고려의 왕자들은 볼모로 몽골 제국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몽골 습속을 받아들였고, 몽골 공주와 혼인은 이러한 몽골화를 가속화했다. 충렬왕의 경우 고려 왕실과 신하들 모두 몽골식 복장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흠집을 냈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몽골조정과의 친밀화가 고려왕실에 해를 끼친 것만은 아니었다. 충렬왕이 몽골 조정을 직접 방문하여 담판함으로써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배치된 몽골군과 그간 고려의 국정에 간섭하던 다루가치(Darughachi, 한자어로 達魯花赤)를 철수시켰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또한 몽골 측을 설득하여 한반도 서북방에 설치된 몽골직할령이었던 동녕부(東寧府)를 반환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몽골 조정에서 숙위하던 고려왕자들의 몽골 내 정치력이 높아졌다. 고려 원종(元宗)의 지지가 당시 계승 전쟁 중이었던 원 세조 쿠빌라이(Qubilai)에게 정치적 도움이 되었고, 충선왕 역시 계승 과정에서 무종 카이샨(Qaishan)을 지지함으로써 그의 즉위를 도왔다. 이렇게 몽골 군주의 부마(駙馬)이자 지지세력으로서 고려왕의 지위는 몽골 제국이 구축한 세계 체제 안에서 고려가 특별 대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몽골 군주의 이익에 적극 협력하여 얻어낸 만큼 그 댓가도 적지 않았다. 고려는 몽골의 제후국이라는 지위가 굳어졌고, 몽골 군주의 책봉과 지지없이 고려왕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인질 외교'에 참여하게 된 또 다른 경우는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청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과 다른 중직 자제들과 함께 청으로 끌려가 8년간 볼모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의 활동을 살펴보면 일종의 외교관과 다름없었다. 그는 현지 언어를 익히고 청의 몽골원정에 참가했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점령하자 그 곳에 도착하여 70여 일 머물렀는데, 거기서 천주교 신부등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했다. 무엇보다 청나라에 투옥된 조선 신하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또한 조선에 부담이 되는 청나라의 외교적 요구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흉노에서 오스만제국, 청나라까지 계속된 '인질 외교'의 풍속은 중앙유라시아 초원 유목국가들의 전통적 외교적 관습으로 유라시아 전역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역사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고유한 외교 관례와 제도를 구축한 중앙유라시아 사회는 '야만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 이슬람, 서구 문명과도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사회 문화 및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야만적이지 않은 `인질외교` 확산… 양국 현안조정 외교관 역할도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