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학생들,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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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학생들,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맞서다

   
입력 2021-09-01 19:25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학생들,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맞서다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동맹휴학'(同盟休學)의 사전적 의미는 학생들이 교육 또는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적으로 벌이는 저항운동을 말한다. 지금은 동맹휴학을 찾아보기란 힘들지만 100년 전만 해도 동맹휴학은 빈번했었다. 당시 이 땅의 학생들이 어떤 이유로 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1920년 7월 7일자 조선일보에 '배재학생 동맹휴학'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정동 배재학당 1학년 42명은 지난 3일 조선어를 기본학과로 하여 조선 역사를 학과에 넣어 교수해 달라는 요구를 학교에 제출하였는데 (중략) 6일 아침에는 1학년 학생의 겨우 1/3이 출석하였을 뿐으로 그 외는 다 동맹휴학하였다더라."
1922년 2월 23일자 신한민보에 '조선인을 모욕한다고 목포 학생 동맹휴학'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목포 대성동 상업전수학교 조선인 생도 38명 전부는 지난 23일 목포부청과 학교 당국에 교장의 조선인 생도에 대한 무진(無盡)의 압박과 치욕적 행위의 까닭에 우리 조선인 생도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으로 항의한다. (중략) 그동안 교장이 우리에게 특히 자극을 준 언어는 첫째, 점심을 가지고 오지 아니한 학생에게 "망국민(亡國民)은 별 수 없다"고 한 것, 둘째, 거짓말은 '조선인의 국민성(國民性)'이라고 한 것, 셋째, 조선인은 부패한 식물(김치)을 먹는다고 한 것, 넷째, 조선인 학생은 변소에 악언(惡言)을 쓴다고 한 것, 다섯째, 조선인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님은 그 아내의 낯을 대하려 함이라고 한 것, (중략) 일본인 교사도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을 동정한다더라."

1921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는 '의전(醫專) 두개골 사건'이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1921년 5월 26일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두개골 분실 사건이 생기자 동교 교수 쿠보시게(久保茂) 박사와 조선인 학생 간에 충돌이 생겼다. 이유는 쿠보 교수가 항상 조선민족을 모욕한다는 것이었다."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학생들,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맞서다

1921년 6월 4일자 매일신보도 이 사태를 다루고 있다. "학생 뿐 아니라 조선 전 민족을 모욕하는 선생에게는 결단코 교수를 받을 수가 없으니, 우리들은 동맹휴학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의논을 하여, 오후 2시 40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의가 되었는바, 쿠보 교수가 우리 학생들을 교수하지 않겠다든지 혹은 사직을 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상학(上學; 등교)을 하지 아니하겠다는 뜻으로 결정이 되었다."

이처럼 동맹휴학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모욕, 일본인 학생과의 차별 등으로 일어난 것이 많았다. 여기에는 일본인 교사 뿐만 아니라 일부 조선인 교사도 가세했다. 이들은 학생들을 잔혹하게 다뤘다. 욕설은 기본이고 폭행을 해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또한 동맹휴학은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1932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를 살펴보자. "중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평산(李平山)이 ML당(마르크스-레닌 당) 관계자로 방금 상해(上海) 방면에 망명하여 있는 한위건, 양명 등과 연락을 맺어 가지고, 조선에 잠입하여 중앙고보, 휘문고보, 중동학교, 법정학교, 제1고보, 제2고보, 청년회학교, 보성전문학교, 동덕여고 등 경성 시내 각종 남녀 학교에 '프락치'(특수한 임무를 띠고 다른 조직체나 분야에 파견되어 비밀리에 활동하는 사람)를 두어 좌경사상을 선전하고, 또 동맹휴학을 일으키게 하여 동덕, 중앙, 제1고보 기타 여러 학교에 동맹휴학을 일으켰고, 또 일으키게 하려는 와중에 종로경찰서에 발각 체포된 것이다."


상식 밖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동맹휴학도 많았다. 자질 부족의 교원들이 대거 임용된 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1920년 11월 11일자 매일신보의 '오산학생 동맹휴학'의 기사에는 "정주 오산학교 중학생 2학년생 41명은, 2학년 담임선생 안병락(安炳洛)씨의 음주(飮酒) 이취(泥醉; 술에 몹시 취함)하여 폭행한 일이 있는 고로, 지난 2일에 동맹휴학을 제기하여, 본교 교장 조만식(曹晩植)씨는 학생에 대하여 간권(懇勸; 간절히 권함)한 바 있다더라."

1921년 12년 5일 동아일보에는 '선생 배척으로 양정학교의 분요(紛繞; 서로 어지럽게 뒤얽힘)'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시내 봉래정 3정목에 있는 사립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는 1,2,3,4 각 학년 학생의 상업을 가르치던 김종원(金鍾遠, 27)씨가 학생에게 불친절하다 하여, 김 씨를 갈아 주기 전에는 공부할 수 없다 하여, 하루 동안 동맹휴학을 하였다고 한다."

학교 행정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된 동맹휴학도 눈에 띈다. '소의(昭義)학교 맹휴(盟休)'라는 제목의 1921년 5월 28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시내 봉래정에 있는 소의학교 제2학년생 전부와 1학년생 다수가 동맹휴학을 하는바, 그 내용을 대강 듣건대, 학교 설비 개선, 교원(敎員) 초빙 등을 담은 진정서를 교장 방규환(方奎煥)씨에게 보내고, 만일 승낙을 하면 등교를 하겠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학교에 나오지 않겠다는 바더라."

1921년 9월 22일자 매일신보에는 '정진여학교(正進女學校)의 분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평양 정진여학교에서 4학년을 담임 교수하던 최은희(崔恩熙·18) 교사를 아무 이유 없이 내 보내고자 하여 (중략) 그 선생이 나가면 4,5학년 학생들은 전부가 다 퇴학하겠다 하니, 장차 어떻게 해결이 될것인지 실로 일반 사회의 주목할 초점(焦點)이라 하겠더라."

동맹휴학의 결과로 학생들에겐 자퇴, 퇴학, 무기정학 등이 내려졌다. 재판에 넘어가 집행유예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1928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전북 전주고등보통학교 분규 사건으로 14명에 대하여 특별히 정상을 참작한다 하여 재판부가 3년, 2년간 집행유예를 언도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등학교 학생들은 물론 초등학생들까지 동맹휴학을 하며 맞섰다.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지만 학생들의 기상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학생은 교육의 대상(對象)이 아닌 교육의 주체(主體)다.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가 되면 학교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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