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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코카서스 3개국중 유일한 산유국… 주변 강대국 이해관계로 혼란

   
입력 2021-12-26 19:46

바쿠서 석유 채취 후 연료로 사용
17세기 말 페르시아·터키로 수출
1859년 세계 첫 석유정제공장 건설
민족주의 고조·러 정치 의도 영향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분쟁 지속
2차 전쟁후 군사·정치적 입지 확보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코카서스 3개국중 유일한 산유국… 주변 강대국 이해관계로 혼란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북방 프리즘 - 아제르바이잔: 석유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4)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3국 중 영토가 가장 넓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많으며, 조지아 및 아르메니아가 유럽에서 가장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국가들인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이다. 아제르바이잔은 국명이 '신성한 불의 나라(The Land of the Holy Fire)'에서 유래할 정도로 국토 전역에 화산이 산재하고 유전지대가 넓게 분포한다.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는 1990년대 초부터 아르메니아가 실효 지배하였던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가 위치하고, 서쪽에 국경을 접하는 아르메니아 영토너머에 고립영토인 나흐체반(Naxcivan)이 있다. 이러한 국토의 분할로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의 우선 목표는 영토의 완전한 통합이다.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는 고대 이래로 여러 민족이 거주하였던 곳인데 1067년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셀주크제국(Seljuk Empire)이 들어서면서 그 일파인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본격적으로 정착하였다. 셀주크투르크는 터키민족의 원형으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민족, 언어적으로 유대감이 깊다. 아제르바이잔 역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동일하게 몽골, 페르시아 및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다가, 1917년 제정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다가 1920년 소련에 점령당해 공산화되었고 이후 1991년 독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코카서스 3개국중 유일한 산유국… 주변 강대국 이해관계로 혼란
송병준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코카서스중 유일한 산유국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3개 중 유일한 산유국으로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아랍인들이 남긴 문헌에 따르면 9세기경에 이미 바쿠에서 석유를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다. 또한 1273년 카스피해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바쿠 인근의 유전에서 석유를 채취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17세기 말에는 바쿠에서 채취한 석유가 인근 페르시아, 인도 및 터키로 수출되었다. 19세기 들어 바쿠의 유전개발이 본격화되어 1846년 제정 러시아는 최초로 드릴로 지층을 뚫어 석유를 채취하였고, 1859년에는 세계 최초로 바쿠에 석유정제공장이 들어섰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의 민간투자자들이 바쿠에서 석유사업을 개시하였고, 1878년에는 노벨상을 제정한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형제들이 바쿠에 정유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오일붐으로 19세기 말에는 전 세계 석유의 약 절반이 바쿠에서 공급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바쿠 인근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어, 2차 대전 기간인 1941년 소련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76%가 아제르바이잔에서 공급되었다. 2차 대전의 형세를 바꾼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는 독일이 바쿠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러시아를 침공한 것이다.

1990년대초 소련으로부터 독립이후 일리예프 대통령은 정권안정과 경제개발을 위해 새로운 유전개발에 박차를 가해 1994년 아제리-시라그-구나슬리 유전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채굴이 개시되었다. 이후 1999년에 바쿠 해안에서 샤 데니즈 가스전(Shah Deniz Gas Field)이 발견되어 2001년 터키와 판매협정을 체결하였다. 뒤이어 2006년부터 가스채굴이 시작되었다. 2006년 바쿠(Baku)에서 조지아의 트빌리시(Tbilisi)를 거쳐 터키 남부 제이한(Ceyhan)까지 이어지는 BTC 원유파이프라인, 그리고 2007년에는 역시 바쿠와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동부 에르주룸(Erzurum)까지 연결된 BTE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완공되어 에너지 수출이 본격화되었다.

조지아를 경유하여 터키를 잇는 두 개의 파이프라인은 코카서스 3개국의 정치, 경제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서유럽과 우크라이나까지 천연가스 판매가 가능해져,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도한 천연가스 수급을 아제르바이잔으로 돌려 2018년 기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천연가스 비중은 46.8%로 감소하였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조지아가 유럽으로 수출하는 에너지 루트의 길목이라는 점에서 파이프라인 완공 이후 조지아와 정치, 경제적으로 관계를 심화하고 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에서 유럽으로 최단코스의 길목에 위치한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으로 소외되면서,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및 정치적 의존이 고착화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역사적 맥락

2020년 9월 아제르바이잔의 침공으로 발발한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전쟁은 남코카서스에서 민족간 갈등과 주변국의 영향력이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지형을 보여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813년 코카서스 3국을 점령한 제정 러시아가 기독교 세계의 보호막으로 본 지역에 같은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이주시키며 아제르바이잔과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이전에도 본 지역에는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이 거주하였고 양국 모두 이러한 사실을 들어 나고르노-카라바흐은 지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왔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직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상호간 고대의 적(ancient enemies)이라는 인식과 잠재되었던 뿌리 깊은 불신이 표면화되었다. 역설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으로 야기된 민족주의는 아제르비아잔과 아르메니아 모두 새로운 국가건설의 동력이 되었다. 1991~1993년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결과 본 지역은 양국 모두에게 국가통합과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변모하였다. 이에 시간이 경과하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어떠한 합리적 해결책에도 동의할 수 없는 배타적인 시각이 형성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패전으로 영토의 약 20%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아제르바이잔에게 국가적 수치로, 시간이 갈수록 알리예프(Ilham Aliyev)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동인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군사적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스탈린의 분할과 지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 오랜 분쟁은 양국의 고조된 민족주의 이외에 러시아의 정치적 의도가 깊숙이 내재한다. 20세기 초 코카서스 3국을 점령한 소련은 통치과정에서 분할과 지배(divided and rule policy)라는 인위적인 영토분할정책을 취하였다. 당시 스탈린(Joseph Stalin)은 아르메니아계가 다수를 점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귀속하고, 아르메니아인이 주도하는 자치주(Oblast)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 민족간 긴장관계를 조성하여 본 지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의도이다.

이후 아르메니아 정부는 지속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완전한 아르메니아 영토 귀속을 요구하였다. 결국 아르메니아는 이러한 요구가 묵살되자 1991년 소련으로보부터 독립과 함께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예를 따라 민족자결 원칙을 들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여 아제르바이잔과 군사적으로 충돌하였다.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시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임을 들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집단안보조약기구 비회원국인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서 일어난 군사적 충돌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러시아는 상황을 지켜보다 평화협정을 주도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고 본 지역에 평화유지군 형태로 5년 시한으로 자국군을 주둔시키는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미 아르메니아 제 2의 도시 규므리(Gyumri)에 러시아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잇는 통로인 라친(Lachin)회랑에 또 다시 러시안군이 주둔하게 되어 본 지역에서 러시아의 군사,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최종 승자는 러시아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0년대 말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방개혁에 따른 이완된 분위기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국에서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아르메니아 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1차 대전시 터키에 상실한 영토회복을 주장하면서 정치권과 사회전반에서 호응을 얻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의 쿠데타로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소련군의 철군 개시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힘의 공백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공백기를 틈타 본토의 아르메니아 군이 진주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아르메니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완충지대로 삼기 위해 추가로 인접한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에 달하는 7개 지역까지 점령한 뒤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을 설립하였다. 1991~1992년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측에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1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아르메니아에서는 250,000여명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약 1,100,000명의 전쟁난민이 발생하여 원거주지를 떠났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보다 인구도 3배가 많고, 경제력도 앞선다. 그럼에도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패전으로 자국내 영토 내에 타국이 실효지배하는 영토가 있으며, 인근 영토까지 빼앗기고,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의 패배를 국가적 수모로 생각하고, 1차 전쟁 이후 치밀하게 군사, 외교적 준비를 진행한 뒤 2020년 9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전쟁의 양상은 1차 전쟁과 판이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과 터키로부터 들여온 드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취약 지역을 집중적으로 포격하여, 본격적으로 지상전이 전개되기도 전에 아르메니아군은 괴멸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아제르바이잔과의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러시아에 휴전 중재를 요청하여, 2020년 11월 평화협정 체결로 무력 충돌은 6주 만에 종료되었다.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패배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1/3을 탈환하고, 1차 전쟁시 상실한 7개의 자국 영토도 완전히 수복하였다. 본 전쟁으로 양국에서 병력 6,000-6,500여명이 사망하였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거주하는 1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10만 여명이 기반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살던 곳을 떠났다.

◇전쟁의 결과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알리예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2018년 벨벳혁명으로 집권한 아르메니아의 파르시안(Nikol Pashinyan) 총리는 전쟁의 패배의 책임을 물어 퇴진요구가 거세지고,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20세기 초 제노사이드의 경험을 들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토고수를 민족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는 아르메니아 국민들은 큰 상실감을 갖게 되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통해 아르메니아 본토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라친회랑(Lachin Corridor)과 거점 도시인 슈사(Shusha)도 탈환하여 군사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령하였다. 이외에도 서쪽의 고립영토인 나히체반(Nakhchivan)과 본토를 연결할 수 있는 군사적, 정치적 입지도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은 추후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경유하여 터키와 유럽까지 운송망 연결이 가능해져 경제적 이해까지 넓히게 되었다. 결국 아제르바이잔은 국제사회의 중재노력과 아르메니아계 난민의 거취 등 여러 부담을 고려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완전히 탈환하지 않고도 정치적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였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 갈등은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과 같은 전환적인 사고 혹은 현 상태의 유지 단, 두 가지 해결책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해 당사국이 자력으로 문제해결을 꾀하기는 어렵다 또한 주변 강대국의 엇갈린 이해로 현재와 같이 '전쟁은 없지만 평화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아제르바이잔의 이해가 관철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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