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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 칼럼] 우리들의 `임금님`, 어디에 있나

박영서 기자   pys@
입력 2022-06-07 18:41

박영서 논설위원


[박영서 칼럼] 우리들의 `임금님`, 어디에 있나
1926년 4월 21일 자정께 영국 런던에서 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요크 공작 앨버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사이의 첫 딸이었다. 아기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기의 아버지 앨버트 공작은 국왕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40살 때 예기치 않은 일을 맞게 된다.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여성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관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인생은 큰 아버지의 왕위 포기로 바뀌게 된다. 앨버트 공작은 형을 대신해 1936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영화 '킹스 스피치'로 널리 알려진 조지 6세다. 엘리자베스는 부모와 함께 버킹엄 궁전으로 이사를 했고 '엘리자베스 공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사망했다. 당시 공주는 남편인 필립 공과 함께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 중이었다. 다음 날 공주는 25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다음 해인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다. 대영제국의 여왕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70년이 흘렀다. 지난 2일은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70년을 맞은 날이었다. 2일부터 5일까지 4일 동안 즉위 70주년 축하 행사인 '플래티넘 주빌리'가 성대하게 열렸다. 영국의 왕 가운데 '플래티넘 주빌리'를 치른 군주는 엘리자베스 2세, 단 1명 뿐이다.

70년 전 왕좌에 오른 이래 지금까지 여왕은 온갖 풍파를 겪었다. 물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위기도 많았다. 가장 큰 위기는 장남 찰스 왕세자의 이혼,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죽음일 것이다. 1996년 찰스 부부의 '진흙탕 이혼극'은 왕실의 속사정을 대중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이듬해 다이애나 비가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는 버킹엄궁에 조기(弔旗)를 달지 않아 민심의 분노를 야기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손자인 헨리 왕손 부부의 왕실 탈퇴, 차남 앤드루 왕자의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런 일들은 왕실의 이미지를 훼손했고 군주제 폐지론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은 국민들이 원하는 왕실 본연의 자세를 계속 지키면서 위기를 헤쳐나갔다. 개인적 의견은 숨겨둔 채 정치나 당파를 초월해 공무에 힘썼다. 적대세력과는 협력해 분열을 치유했고, 필요하면 개혁에도 유연하게 임했다. 그러는 사이 여왕은 영국인 전체를 단합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영국과 영연방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상당수 영국인들은 정치를 믿느니, 왕실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군주제는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체제다. 그런데 영국의 군주제는 민주주의 하에서 민주주의 이전보다 더 잘 존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여왕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는 영국의 여왕이 나라의 '큰 어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 한국에는 '큰 어른'이 없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선 어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웃자란' 어른들의 퇴행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권은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지만 '편 가르기'에만 몰두한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이라는 미명 하에 집회는 확성기 소음과 쌍욕이 난무하는 반(反)지성의 장으로 변질됐다. 일부 정치 유튜버들의 '돈 벌이'는 도를 넘은 지 오래다. '묻지마 살인'에 '토막살인', '존속살인'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품격과 염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국민 모두는 화가 나있는 것 같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해외로 이민가고 싶다고 한다.

공동체는 와해되고 있는데 구심점이 없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서서 중심을 잡아주고 꾸짖어 주는 어른들이 없다. 영국 여왕처럼 구심점 역할을 해줄 우리들의 '임금님'은 어디로 갔는가. 나라와 민족을 잘 이끈다면야 '임금님을 다시 모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으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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