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학 이사 겸 편집국장
![[정구학 칼럼] 백기사 빈 살만과 퇴행하는 민주주의](http://contents.dt.co.kr/images/202211/2022112102102251033001[1].jpg?var=4939 "[정구학 칼럼] 백기사 빈 살만과 퇴행하는 민주주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에겐 구세주와 같은 나라다. 7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석유값이 치솟아 산업화의 시동이 꺼질 수도 있는 위기에 서 중동에 승부를 걸었다. 사우디를 다녀온 관료들이 "너무 더워서 공사를 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한테 가보라고 했다. 중동을 둘러본 정 회장이 "각하, 하늘이 우리를 돕나봅니다. 1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공사를 계속 할 수 있고, 사막엔 건설자재인 모래와 자갈이 널려 있습니다. 더운 낮엔 자고 시원한 밤에 일하면 됩니다"라며 박 대통령을 안심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 선배 세대들은 열사의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 종잣돈을 그렇게 벌어왔다.
반세기만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스터 에브리씽'이라 불리는 실권자 빈 살만 왕세자가 오일머니의 훈풍을 가득 몰고 왔다. 우리로서는 실리를 챙기기엔 단비 같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위기'로 벌어지는 비관적인 경제 기사를 싣느라고 곤욕인 언론도 모처럼 낭보를 전했다.
빈 살만의 행보는 21세기 지구촌 민주주의 축소판이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돈, 특히 독재자의 칼날 앞에 작아지는 현실을 목도해서다. 사우디 왕실을 비판했던 언론인 까슈끄지를 암살한 배후에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고 떠들었던 미국도 마찬가지다. 응징을 주장하던 바이든 미 대통령은 자국 석유값이 급등하자 빈 살만을 찾아가 SOS를 쳤지만, 빈 손으로 돌아오는 굴욕을 당했다.
30년 전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지구 행성에 만개할 것 같던 자유민주주의 꽃이 시들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세계 170여개 국가의 정치체제를 구분, △불완전 민주주의 국가가 42.7%로 가장 많고 △권위주의 체제 35.6% △완전 민주주의는 5.7%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동태적으로도 세계 민주주의 지수가 이전보다 개선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통계가 아니더라도 뉴스를 통해서도 민주주의 퇴행을 직감할 수 있다. 빈 살만과 같은 산유국의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신집권을 꿈꾸는 중국의 시진핑,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통해 전체주의를 강화한 푸틴, 미국을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쏴대는 북한의 김정은이 다스리는 나라는 세계 민주주의 지수를 갉아먹고 있다. 민주주의 최상위권에 오른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국이 구가하는 자유와 법치는 아직도 지구 한편에선 정치의 사치재다.
왜 그럴까? 지도자들이 유권자의 이성보다는 감성을 악용해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과 신권위주의가 극성인 남미와 남유럽이 대표적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정치가 타락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된다'고 경계했던 그대로다. 절차상 수적 우세를 인정한 민주주의의 맹점이다.
우리나라는 압축적으로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이룬 자랑스러운 선진국이다. 이런 겉과 다르게 속에선 민주주의가 곪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진영논리는 민주주의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열린 사회가 아닌, 닫힌 사회는 전진하지 않는다.
미국 여론조사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에서 '다른 당 지지자 간에 갈등이 있냐'는 질문에 '강하다,혹은 매우 강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한국이 90%로, 미국(88%)을 제치고 19개 설문 대상국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정치적 분열이 극심하다는 의미다.
지난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에서 나온 선언문이 오죽하면 '민주주의 강화와 신뢰 구축' 이었을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들조차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창할 정도로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져 있다. 인류가 최적 정치모델로 쌓아온 민주주의가 자유 실현이라는 장점보다 감성의 집단화란 덫에 걸려 있다. 지도자나 국민이 들뜬 감정보다 차가운 이성을 훈육할 때다.
정구학 이사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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