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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DT인] `은퇴작` 대박낸 50대 화장품맨… "26년 디렉터 삶을 모두 담았습니다"

김수연 기자   newsnews@
입력 2023-11-13 18:38

화장품 브랜드 '느슨' 만든 권병욱 필코스 디렉터
쓰디 쓴 인생후반기에 '마지막 브랜드' 내놓을 극적인 기회만나
발효콘셉트 브랜드로 크라우드펀딩 총 2억3000만원 성공시켜
캐릭터·굿즈도… "시니어 색조메이크업 브랜드 만들고 싶어"


[오늘의 DT인] `은퇴작` 대박낸 50대 화장품맨… "26년 디렉터 삶을 모두 담았습니다"
권병욱 필코스 '느슨' 디렉터. 와디즈 제공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으며 도망치듯 은퇴를 준비하던 50대 화장품맨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브랜드가 필요했던 작은 화장품 회사의 러브콜을 받았고 , 여기서 마지막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와디즈에서 이틀만에 1억 펀딩, 총 2억3000만원의 펀딩을 받은 발효 콘셉트의 화장품 브랜드 '느슨'(neusn)을 만든 권병욱 디렉터(51·사진)가 그 주인공이다.


13일 만난 권 디렉터는 말하기 쉽지 않은 얘기를 먼저 꺼내며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그는 "2년 전, 큰 충격으로 공황장애와 심한 우울증 겪으며 은퇴를 준비중이던 저에게 현재 재직중인 필코스가 연락을 해왔다. '우리도 브랜드가 필요하니 당신도 만들고 싶은 브랜드로 다시 시작해봐!'라고 하더라"고 운을 뗐다.

요즘 화장품업계는 브랜드와 고객 사이에 불필요한 유통과정을 걷어내고 브랜드가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게 대세로 굳어지면서, 유통 중간에 끼어있던 벤더사들이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권 디렉터에게 러브콜을 보낸 필코스 역시 이런 위기감을 실감하고 있었다.

권 디렉터는 해외 명품 브랜드들의 국내 에이전시 등에서 영업책임자, 디렉터로 일해왔다. 능력을 알아 본 한 기업 회장으로부터 화장품 사업 대표 자리를 권유받고 준비하다가 사업이 무산되면서 쓴 인생 후반전으로 갑작스럽게 내몰린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년을 알고 지냈던 협력사로부터 러브콜이 온 것이다. 재기의 기회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브랜드가 필요했던 회사와, 의미있는 은퇴를 위해 마지막 브랜드를 갖고 싶었던 디렉터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진 셈이다.

그는 "겨우 50의 나이에 도망치듯 은퇴하는 모습이 딸들에게 부끄러웠던 저는 마지막 기회가 온 것 같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은퇴작이라면 타인에게 듣는 마지막 평가이면서 내 스스로에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기까지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을 투입했다"고 덧붙였다.

오전에는 물류일을 돕고 오후에는 기획을 하는 하루하루를 보낸 끝에 탄생한 은퇴작 '느슨'은 권 디렉터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그는 "타 브랜드의 리브랜딩 컨설팅을 하면서 발효 화장품 성분에 대한 매력에 빠졌다. 발효는 과장 없이 피부 효능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 그 자체였다"면서 "재촉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고, 발효 원료를 길들이는 '발효는 기다림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브랜드 네이밍에 영감을 줬다"고 했다. 이어 "'느슨'은 완제품이 아닌 메인 원료 한가지를 위해 16개월을 들였다. 그 기간의 노력, 기다림, 길들이기, 자신만의 속도, 나의 기준 등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느슨' 이라는 네이밍이 떠올랐다"고 브랜드 탄생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는 "발효과학을 알게 된 시점이 저에겐 전환점이 된 것 같다"면서 "과학적 근거와 논문들이 넘쳐나 과장하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 설명해도 되는 점이 좋았는데, 발효에 대한 몰입이 공황장애를 서서히 완화시켜 주는 아이러니한 경험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브랜드의 화장품이 생기는 화장품 홍수시대에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진정성'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원료사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다. 16개월동안 세상에 없었던 발효원료 3가지를 만들고, 두 딸이 친환경 용기와 리필 방식을 찾아냈으며, 비건 인증을 받아내고, 제조사가 주는 레시피가 아니라 직접 첨가할 성분들을 정리해 25개 이하의 성분만으로 클린 뷰티를 만들어냈다"며 "유행하는 트렌드를 피하고 26년간 누적됐던 디렉터의 신념과 취향을 담았다"고 자신했다.

특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이 주요 프로세스인 한국의 화장품 업계에는 제조사가 그들의 레시피로 똑같은 콘셉트를 제공해주다 보니 스토리가 겹친다"며 "진정성있는 과정이 느껴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상상하게 되고 그 브랜드를 사랑하게 된다. 마케팅이 파는 방법이라면 브랜딩은 사랑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듯이 말이다"고 강조했다.

50대에 은퇴작을 내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은 그가 지속해온 화장품 인생여정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이과 출신이 가득한 화장품업계에서 문과출신 디렉터로서 살아온 화장품맨의 스토리가 이런 시도의 밑그림이 됐다.

그는 "어찌하다 보니 문과 출신이 26년간 화장품 업계에서 살아왔다. 젊을때 문과 출신이라며 이과 출신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무시를 받았다. '니가 뭘 안다고 그래?', '그게 되겠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근데 기승전결 문맥이 없거나 논리가 없으면 절대로 디렉팅을 하지 않는 문과 출신의 고집이 또래들이 은퇴한 이 시장에서 지금도 디렉터로 살아가게 만들어준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토리가 중시되는 요즘 시장에서 글로 브랜드를 표현할 줄 아는 문과적 성향이 그만의 장점이 됐다는 것이다.

권 디렉터는 지금은 그림으로 브랜드를 표현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머리로 피지를 주어먹는 '줍줍', 피부결을 엉덩이로 고르는 '샤브작', 피부에 드러누워 조명을 켜는 '켜니' 등 피부를 지키는 포스트 바이오틱스 삼총사를 '느슨'의 캐릭터로 그려냈다. 사용자들이 '느슨'을 보다 잘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책갈피, 엽서, 볼펜 등의 굿즈도 만들고 있다.

50대 화장품맨은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그는 "'느슨'은 월급쟁이로서의 은퇴작"이라며 "혹시라도 사업을 하게 되면 시니어 색조 메이크업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와디즈에선 '느슨'의 앵콜 펀딩이 진행 중이다. '느슨'을 향한, 그리고 26년 화장품 인생에 선사하는 이 '앵콜'이 또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낼 지 주목된다.

김수연기자 newsnew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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