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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애 칼럼] 21세기 `디지털 大木` 비상을 꿈꾼다

안경애 기자   naturean@
입력 2023-11-14 18:28

안경애 ICT과학부장


[안경애 칼럼] 21세기 `디지털 大木` 비상을 꿈꾼다
세계 최장수 기업이 일본 회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기업의 뿌리가 백제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더더욱 드물다.


주인공은 오사카에 본사를 둔 건축회사 '곤고구미(金剛組)'다. 서기 578년에 설립돼 14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회사의 창업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 '대목(大木)' 곤고 시게쓰미(한국명 유중광)다. 곤고구미는 39대를 이어가며 일본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건설하고 유지보수하며 그 자체가 역사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나라의 호류지 오층탑과 일본 3대 성 중 하나인 오사카성이 곤고구미의 작품이다.
백제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한반도 선조들은 일본에 농업기술, 역학, 천문학부터 불교와 예술까지 전파했다. 대목뿐 아니라 석공과 도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물과 석탑, 도자기 같은 예술품을 만들었다. 일본은 서기 500년 전후 최소 100만명 가까이 넘어간 한반도 이주인들로부터 정신과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고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21세기를 맞아 일본에 한국의 디지털 기술과 문화, 소프트웨어가 또한번 파고들고 있다. K팝, K콘텐츠, K-푸드에 이어 K-디지털 기술이 고요히 정체돼 있는 일본 사회와 산업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대표적인 게 네이버의 메신저 서비스 '라인'이다. 성공 비결은 철저한 현지화와 이익공유 모델이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설립 2년차인 2000년에 네이버재팬을 설립한 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일본을 오가며 10년간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빛을 본 게 라인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통신 두절 상황에도 인터넷 SNS는 굳건했던 것이 힌트를 줬다. 네이버는 당시 3개월간 신속하게 개발해 라인을 내놨다. 이후 라인은 출시 1년 만에 일본 1위 자리를 꿰찼다. 네이버는 라인의 파워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더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본고장 일본에서 K-웹툰의 파워도 강력하다. 카카오의 웹툰 플랫폼 '픽코마'와 네이버의 '라인망가'가 시장을 평정하고 있다. 일본 웹툰 시장 1위인 픽코마는 2016년부터 3조4000억원이 넘는 누적매출을 거두며 매출의 90% 이상을 일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2013년 일본 서비스를 시작한 라인 망가의 누적 매출도 약 3조가 넘는다.
B2B(기업간 거래) IT와 소프트웨어에서도 희망이 보인다. 기업 경영의 뼈대인 ERP(전사적자원관리)를 공급하는 영림원소프트랩은 지난 11일 일본 오사카에서 설립 30주년 기념 전직원 워크숍을 열고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1등 ERP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을 천명했다. 일본 국내 기업 수의 99.7%, 갯수로는 420만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이 타깃이다.

일본 ERP 시장은 글로벌 기업과 현지 기업이 난립한 상황이다. 글로벌 제품은 일본 중소기업이 쓰기에 너무 비싸고, 현지 제품은 기술과 기능이 처진다는 문제가 있다. 영림원은 그 부분을 파고든다는 전략이다. 일본 기업들은 검증 안된 제품은 도입하지 않고, 한번 신뢰가 쌓인 기업은 계속 거래하려는 특성이 강하다 보니 해외 기업이 자리 잡기 힘들다. 영림원은 직원 2500여명, 고객사 3만개를 보유한 70년 역사의 일본 기업과 손잡고 시장에 안착한다는 포부다. 이 행사에서 '100년 기업'이 되겠다고 천명한 권영범 영림원 대표는 100년 이상 된 기업이 3만개가 넘는 일본 기업들의 장수 DNA를 배우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고(最古) 기업 곤고구미를 1400년 이상 지탱시킨 경쟁력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사찰과 전통 목조가옥에만 집중한 전문성과 장인정신이었다. 일본 기업의 꾸준함과 고집스러움에, 한국 기업의 역동성과 유연성이 더해진다면 서로의 약점을 채우고 강점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바꾸지 않는 일본과 애자일 시대에 맞게 민첩하게 변화하는 한국, 구식 기술에 멈춘 일본과 신기술을 빠르게 수용하는 한국, 창업 에너지가 부족한 일본과 스타트업이 수없이 생겨도 이를 받아줄 시장이 부족한 한국이 만나면 서로가 얻을 게 많을 것이다.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틀에서 벗어나 변화와 혁신에 약한 일본 시장에서 '21세기의 곤고구미'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득한 과거의 '문화 코드' 전수에 이어 '디지털 코드' 전수로 또 한번의 역사가 만들어지길 꿈꾼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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