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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학 칼럼] 번지수 헛짚은 장관들의 현장 행차

정구학 기자   cgh@
입력 2024-01-08 20:17

정구학 이사 겸 편집국장


[정구학 칼럼] 번지수 헛짚은 장관들의 현장 행차
요즘 신임 장관은 현장부터 달려간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작년말 내정을 받자마자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을 찾았다.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시장 상인들과 현장 간담회를 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됐다. 신문 방송엔 '최상목 경제부총리 후보자, 민생 현장 행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신임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취임 이후 자동차 수출현장 방문에 이어 두번째 민생 행보로 경기도 고양시 경로당을 방문, 난방비 대책 이행 현황을 점검했다. 역시 언론엔 '안덕근 장관, 에너지복지 현장 방문해 난방비 지원대책 이행실태 점검'이란 기사로 채워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도 부임하자마자 부산 자갈치 시장을 찾아 수산물 물가와 민생 상황을 점검했다.
호들갑을 떠는 장관들의 현장 방문은 국내 정치상황과 딴판인 북한의 김정은 행보와도 오버랩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닭공장 현지 지도에 딸 주애를 동반한 데 대해 우리 정부는 뭐라고 했을까. 통일부는 "민생을 함께 챙기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닌가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민생현장 챙기기라는 연출이 어쩌면 민주국가인 대한민국과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똑같이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다.

독일에서 16년간 재임했던 메르켈 전 총리는 현직일 때 주말에 동네 슈퍼마켓에서 혼자 카트를 끌고 장을 봤다. 이런 장면을 누가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려 화제가 됐었다.

물가 관련 장관이 장바구니 물가를 살피려면 남몰래 주말에 부인과 함께 장을 보면 된다. 복지 장관이 현장의 애로상황을 들어보려면 장관 신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시간날 때마다 들러봐야 한다. 실제로 오세훈 서울시장은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서울시내 공공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관들이 암행어사처럼 주말 잠행을 하지 않고, 언론에 알려가며 행차 쇼를 벌이는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내각과 대통령실 수석이 관료로 많이 채워져서 답답해 한다고 전해진다. 이들 '늘공' 출신들의 주특기는 보고서 위주의 업무능력과 자기부처 챙기기다.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를 낼 수 없는 구조적 핸디캡이다. 이럴수록 윤 대통령은 현장을 강조하고 부처 칸막이를 없애라고 일갈한다.


대통령의 실망과 주문이 제대로 먹히려면 각료는 뻔한 보여주기식 현장이 아닌 설득의 현장으로 뛰어가야 한다. 의대정원 확대를 외치는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계 현장에서 의사들을 직접 만나 설득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반대하는 평검사들과 테이블에 마주해 '맞짱 설전'을 벌였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을 개혁하기 위해 관료나 동료 정치인 뒤에 숨지 않고, 노동단체 대표들을 대통령궁에 불러들여 8시간이나 직접 노동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대국민 담화를 하고 전국순회 정책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우리는 어떤가? 노동·연금·교육 개혁을 책임진 장관들은 기득권 혁파를 위한 설득의 현장을 만들지 않는다. 시민안전의 현장을 챙겨야 할 서울 용산구청장은 재작년 이태원 참사 때 자신의 집 근처를 둘러보곤 '현장'을 점검했다고 거짓말했다가 들통났다.

요즘처럼 온라인 실시간 정보가 발달한 시대에 장관의 또다른 현장은 여론이 가감없이 전달되는 기자회견장이어야 한다. 기자와 전문가를 수시로 만나 여론을 듣고 궁금증에 답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각계 인사들과 '소맥 폭탄주'를 곁들이며 소탈하게 소통한다고 한다. 대통령도 밑바닥 민심을 훑으려면 소통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

현장을 강조하는 말로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작금의 떠벌리는 각료의 현장 행차는 우문현답이 아니라 현문우답(賢問愚答)일 뿐이다.

대통령이 피부에 와닿는 성과를 내기 위해 현장에 가라고 했는데,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설득의 현장이 아니라 보여주기식 언론플레이 현장에만 달려가기 때문이다. 안가는 것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이런 행차를 준비하는 아랫사람들의 월급만 국민 혈세로 빠져나가서다.이사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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