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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칼럼] 삼성에서 `S`가 사라진 까닭

박정일 기자   comja77@
입력 2024-03-05 15:46

박정일 산업부장


[박정일 칼럼] 삼성에서 `S`가 사라진 까닭
지난 1999년 9월 대만에서 진도 7.6의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현지 반도체 생산라인이 모두 멈췄고, 그 다음달 국내 반도체 수출단가와 수출액이 전월 대비 각각 8%와 24% 급등하는 등 한국 반도체 사업에 초호황을 누릴 때가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황창규 전 사장이 반도체연구소장(부사장)을 맡아 소위 '황의 법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괄목할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모두들 대만 지진에 따른 수혜주로 삼성전자를 지목하고 있었는데, 삼성전자는 주요 언론사에 관련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국가적인 비극을 반도체 사업과 연결시키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 속에는 대만 지진과 같은 반사이익 없이도 삼성 반도체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라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SK그룹에 인수된 SK하이닉스는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D램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당시 하드디스크의 대안으로 떠오르던 낸드플래시 사업을 밀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단어를 쏟아내며 사업을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시 40%에 이르는 점유율로 압도적인 세계 1위였던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의 도발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당시 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우리는 양산 단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고 본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럴만도 한 것이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나머지 경쟁사들의 점유율은 삼성전자의 절반 또는 그 밑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강한 의지와 이병철 창업주의 선구안으로 시작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 특유의 스피드(Speed)와 철저한 관리(System)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초격차(Super gap)'의 상징과 같았다. 1983년 '도쿄 구상' 이후 5년 만에 반도체 사업을 흑자 전환 시켰고, 지금은 대한민국 수출의 20% 안팎을 책임지는 K-반도체의 경쟁력이 이 'S'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과 함께 열릴 '제2의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앞두고 삼성전자가 심상찮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뺏겼고, 심지어 지난해 3분기에는 서버용 D램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1위 자리를 내줬다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경쟁사보다 최소 2년 이상은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제는 SK하이닉스는 물론 마이크론, 키옥시아(옛 도시바메모리) 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처지가 됐다. 삼성전자가 지난주 '세계 최초 양산'이 아닌 '개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나마도 같은 날 마이크론이 삼성전자보다 먼저 HBM 신제품 양산 소식을 전하면서 체면이 더 구겨지기도 했다.


논쟁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삼성 반도체의 '초격차' 위상이 흔들렸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장 뼈아픈 점은 '시스템 경영'과 선대 회장때부터 이어져 왔던 '마하 경영',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 했던 혁신 제품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장을 선도하는 리더십도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삼성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법리스크가 이재용 회장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항변도 나올 만하다. 사법 리스크를 정상참작 하더라도 삼성은 이를 극복할 만한 시스템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었는데, 최근에는 이 같은 시스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9년, 당시 133조원 규모의 투자계획과 함께 2030년 비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약속한 기간의 절반이 지났음에도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서는 여전히 10%대 점유율에 머물면서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고, 다른 한 축인 이미지센서 시장에서도 아직까지 소니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 안팎에서는 컨트롤타워 재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이 투명경영을 위해 만든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조차도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와 컨트롤타워 필요성에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유는 이 같은 삼성의 경쟁력 저하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와중에 검찰은 삼성물산 '부당합병' 1심 판결에 항소해 삼성의 리더십 회복에 족쇄를 또 채웠다. 단순히 삼성전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안보의 근간이 되는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에서는 다시 한 번 국내 기업이 '초격차' 경영을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책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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