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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애 칼럼] AI 세계대전, 밀리면 절벽이다

안경애 기자   naturean@
입력 2024-04-30 18:09

안경애 ICT과학부장


[안경애 칼럼] AI 세계대전, 밀리면 절벽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427년 전, 명량 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수백척에 이르는 일본 수군과 맞서기에 앞서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쓴 문구다. 아무도 못 이길 것으로 본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대승을 거뒀다.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운이 아니었다. 철저한 계획과 지휘능력, 절실함이었다. 전투 전날,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도록 군영을 불태운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다음 날 명량해협의 좁고 험한 수로에서 목숨을 내놓고 승리를 만들어냈다.
지금 AI(인공지능), 플랫폼 산업현장이 그때와 비슷하다. 사실상 전쟁터다.

수백, 수천조의 자본에 가장 똑똑한 인재, 앞선 기술에 강한 국력까지 내세운 거대 빅테크들 틈바구니에서 우리 기업들은 버티며 경쟁하고 있다. 액면으로는 이미 승부가 가려졌다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 전장에서 우리 기업들은 기죽지 않고 빅테크들과 때로는 손잡고 때로는 경쟁하며 무시 못할 진용을 갖췄다.

해외에서는 한국을 두고 'AI혁명이 자국 기업들의 실력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고 평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마스크부터 진단키트, 백신·치료제 제조까지 해내는 한국을 보고 놀라워했던 각국은 AI 시대에 기술력을 겨루는 국내 기업들을 높이 산다.

한국이 미국, 중국 등 극히 일부 국가만 가진 자체 AI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랫폼과 클라우드를 가진 덕분이다. 유럽 등 세계 각국이 미국 기술에 의존하면서 규제에 골몰하는 사이에 우리 기업들은 시장에 뛰어들어 포기하지 않고 산업을 일궈냈다. 여기에다 전세계가 목말라하는 반도체 산업을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빅테크와의 확연한 체급 차이다. 12척의 배로 수백척의 왜군과 마주한 이순신 장군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네이버가 몇년에 걸쳐 1조원을 AI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메타는 올해 엔비디아의 GPU를 사는 데만 10조 이상 쓸 것이라고 한다. 작년 10조가 안된 네이버 연매출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다. MS, 오픈AI, 구글, 아마존 같은 빅테크들은 데이터센터 투자계획을 밝히면서 100조 단위의 숫자를 내놓는다.




알리·테무·쉬인에 이어 틱톡까지 중국계 이커머스 기업의 국내 공습도 위협적이다. 이들은 국내 유통산업에 직격타를 가할 뿐 아니라 플랫폼도 흔들 가능성이 있다. e커머스와 플랫폼은 유사성이 큰 산업이다. 인스타그램과 틱톡,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서 출발해 쇼핑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중국 커머스 기업들도 가입자 기반이 커지면 플랫폼의 지위까지 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사용자 수와 사용시간에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우위를 내줬다. 짧은 동영상을 즐겨보는 이들은 네이버와 카카오톡 대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을 찾는다.



빅테크와 C커머스의 '쩐해전술'만큼 위협적인 것은 플랫폼 국수주의다. 미·중은 이미 플랫폼이 단절됐고 각국은 다른 나라의 플랫폼에 대해 규제의 칼날부터 들이대고 있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빌미로 일본 내 '국민 메신저' 라인에 대한 네이버의 경영권을 내놓도록 압박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패권전쟁의 극단에서 대결하는 사이지만 일본의 조치는 이례적이고 비상식적이다.

행정지도는 강제성이 없다지만 외국계 기업이 현지 정부의 뜻을 거스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만에 하나 일본 정부의 뜻이 강경하다면 2019년 반도체 수출규제에 맞먹는 비수를 한국에 꽂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규모와 국력이 밀리는 K-플랫폼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다. 각국 정부는 자국 이익, 자국 기업을 중심에 두고 노골적인 플랫폼 정책과 규제를 펴고 있다. 애플, 구글 같은 빅테크는 유럽연합(EU)에선 앱마켓 수수료 등에서 한발 물러선 조치를 내놓으면서 국내에서는 요지부동이다. 만만한 나라는 'AI 세계대전' 전장에서 설 자리가 없다.

정부가 외교력과 힘 있는 질서를 만들지 않으면 19세기 구한말 같은 상황이 AI와 플랫폼 산업에서 벌어질 수 있다. AI와 반도체의 교집합에 있는 플랫폼을 지켜야 산업의 미래가 있다. 근시안적인 포퓰리즘에 휘둘려 자국 플랫폼 길들이기를 반복할 게 아니라 바깥에 있는 더 무서운 상대를 정면으로 상대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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