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IRA 폐기 현실화… 美현지 전기차시장 20% 급감 전망
2035년 이후 내연기관차 역전 전망… "전동화 대세 지속될 것"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발 빠르게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였을 당시 주요 공약으로 강조했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공약이 속속 현실로 되는 분위기다.
미국 현지에서는 벌써 자국 전기차 시장이 20% 이상 급감할 것이라는 분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성장 정체)에서 버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국내 완성차와 배터리 업체들은 그보다 더한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에 직면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20일 요세프 샤피로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와 펠릭스 틴텔노트 듀크대 교수가 세액공제가 사라지면 미국 내 연간 전기차 등록 대수가 세액공제가 유지될 때와 비교해 31만7000대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차기 행정부는 신차와 경트럭의 연비 요건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산화탄소와 온실가스 배출 관련 환경보호청 기준들도 들여다볼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트럼프 당선인의 정권인수팀 내 에너지정책팀이 최대 7500달러인 전기차 세액공제 폐지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온실가스 저감과 자동차 산업의 전기화를 위한 바이든 정부의 정책을 겨냥하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확대 정책에 대해 전기차 구매를 사실상 강요하는 '의무명령'이라며 "취임 첫날 전기차 의무명령을 끝낼 것"이라고 공언해 왔다.
전기차 시장은 성장세가 급속도로 완만해지는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9월 중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의 총 대수는 약 432만대로 전년 대비 5.4% 올랐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연 평균 성장률이 45.7%였는데, 트럼프 2기 정부의 출범으로 전기차 시장은 이제 역성장할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속도 내는 바이든 전기차 정책 '말살'= 트럼프 당선인은 1기 집권 때도 2025년까지 신차의 연비를 갤런당 평균 50마일 이상으로 높이려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계획을 2026년까지 39마일로 완화했다. 이는 약 22% 감소한 수치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자동차 제조업체에 2030년대 초까지 차량 연비를 갤런당 평균 약 50마일로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 환경보호청 규칙은 신차와 경트럭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 허용치를 설정하는데 2032년 모델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27년에 허용되는 배출량의 절반에 그친다.
트럼프 당선인의 1기 당시 행보와 최근 공약을 고려할 때 연비 요건과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상당히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완성차 업체에 유리한 판을 짜 지지기반을 굳건하게 하려는 속내가 담겼다.
트럼프 당선인은 자국민들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보조금을 해외 기업들에게 준 사례가 바이든 행정부 외에는 전무한 것과 각종 세금 감면의 연장을 위해선 보조금을 폐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데다 차기 내각의 핵심으로 부상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의 지지까지 받고 있는 만큼, IRA 폐기 정책은 빠르게 실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 기조를 충족하기 위해 전기차 신모델 개발에 속도를 높여왔던 국내 완성차와 배터리 업계에는 최악의 상황이다. 국내 업체들은 IRA 보조금을 활용해 수십억달러를 공장 건설에 투자해왔다.
예를 들어 현대차그룹은 IRA에 대응하기 위해 약 7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지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 역시 GM, 포드, 스텔란티스 등과의 합작법인 형태나 단독공장 형태로 활발하게 투자해왔다.
션 황 무디스 연구원은 "LG에너지솔루션, SK온은 IRA에 근거한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관련 수익이 영업이익 비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큰 상황인데 IRA 관련 혜택이 유의미하게 축소된다면 신용도에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 "그래도 전동화 대세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전기차 세액공제가 폐지되더라도 장기적으로 전기차 전환이라는 대세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2035년 이후에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수요가 역전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중간 격인 하이브리드나 EREV(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의 판매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전기차 보급이라는 큰 방향성은 바뀌진 않겠지만 2030년 미국 전기차 신규등록대수가 20%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은 최고 5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전기차 보조금이 없어지면서 전기차 판매가 줄고 하이브리드차 포함 내연기관차 판매가 상대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트럼프 집권으로 전기차 시대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나 시간은 다소 지체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또 완성차 업체들이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기간 동안 기업들이 비용 효율성을 개선하고 전기차의 성능과 배터리 기술을 향상하지 않으면 2030년 이후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2003년 부시 행정부가 일부 환경과 경제 규제를 완화했고, 이는 SUV와 픽업트럭 등 대형차량 판매 증가로 이어졌다"며 "하지만 연비가 낮고 환경 오염 문제가 큰 대형 차량의 지속적인 판매는 유가 상승과 환경 규제 강화라는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해 결국 2008년 금융위기 직격탄으로 GM이 파산의 길 걷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유럽연합이 내연기관차 판매를 금지하는 2035년부터는 전기차로 갈 수밖에 없다"며 "지금부터 약 10년 동안 전동화에 집중하지 않으면 미국 완성차업체들은 또 한 번의 구조조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종욱 한국모빌리티학회 초대회장도 "전기차 시대로 가면서 테슬라를 제외하고 미국 3대 메이커가 중국에 뒤처지고 있다"며 "트럼프가 내연기관차에 기회를 더 줌으로써 이러한 자국 회사들이 중국을 넘어서기 위한 시간을 벌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한나·임주희기자 park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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