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문화평론가
코코아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초콜릿 가격을 끌어올렸지만 주요 유통 채널은 기대치 이상의 초콜릿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최근 조사에선 응답자의 80.4%가 '지나치게 많은 기념일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 같다'고 답했고, 69.6%는 지나치게 많은 '○○데이'로 점점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발렌타인 데이의 영향으로 생긴 화이트 데이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에 자극 받은 업계에 의해 온갖 '데이'들이 속출했다. 그것이 점점 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나마 삽겹살 데이, 오이 데이, 닭고기 먹는 구구 데이 등은 꼭 챙겨야 한다는 압박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처럼 연애와 연관된 데이는 초콜릿, 사탕 등의 세트는 기본이고 추가로 다른 선물과 이벤트도 해야 한다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화이트 데이는 한국, 일본 등에서만 챙기는 날로, 일본의 사탕업계가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일본의 한 제과업체가 마시멜로를 팔기 위해 마시멜로 데이를 만들었는데, 일본 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에서 그 날을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화이트 데이로 개조했다는 것이다. 일본 업계의 상술에 놀아나 화이트 데이를 챙겨온 셈이다.
3월 14일에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에 설득력이 생긴 건,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왜 여자만 줘야 하느냐'며 한 달 뒤를 남자가 주는 날로 하자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발렌타인 데이를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로 만든 것도 일본의 초콜릿 업계다. 원래 발렌타인 데이 자체는 서구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 연인들을 위한 축일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1861년에 영국의 초콜릿 회사가 그날 초콜릿을 선물하자는 마케팅을 시작했다. 이를 일본의 초콜릿 회사가 도입하면서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이라는 의미를 덧붙였다는 설이 있다.
서구의 발렌타인 데이 문화는 남녀의 구분이 없는데 일본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선 발렌타인 데이에 여자만 주다보니, 남자가 주는 화이트 데이 문화가 한 세트로 발달한 것이다. 이중과세다. 한국에선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처음엔 초콜릿, 사탕 정도만 줬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른 선물과 이벤트 등이 추가됐다. 초콜릿 세트의 가격도 점점 더 올라가 이런 데이 문화를 챙기는 것이 청년들에 부담을 안기는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다른 데이들까지 줄줄이 추가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허리가 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데이 문화의 위축이 감지돼 주목된다. 발렌타인 데이 문화가 수입된 이래 데이 문화는 커지기만 했는데 이제 비로소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만 남은 것인가. 80년대 발렌타인 데이에는 좋아하는 이성에게만 초콜릿을 줬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일터에서 다수에게 으레 초콜릿을 돌리는 문화로 확장됐다. 그렇기 때문에 연인이 없더라도 발렌타인 데이를 모르고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또 발렌타인-화이트 데이 때면 편의점에 선물 세트가 잔뜩 쌓여 데이 시즌의 도래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요즘은 초콜릿 돌리는 문화가 그렇게 성행하지 않는다. 편의점에 진열된 선물 세트의 양도 많이 줄었다. 그렇다보니 이 데이들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게 됐다. 젊은 연인들도 이 데이들을 과거처럼 성대하게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 데이들을 그냥 지나친다는 커플도 있다.
아무래도 데이 문화가 지나치게 과열된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단순히 초콜릿, 사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물과 이벤트의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청년 빈곤·불안의 시대에 이런 압박은 더욱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선, '서양의 발렌타인 데이는 남녀구분이 없는데 왜 한국에선 여자만 줘야 하느냐'는 불만이 나타났다. 남성들은 초콜릿만 받을 뿐 선물과 이벤트는 자기 몫이고 바로 직후에 화이트 데이까지 챙겨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그렇다보니 데이 문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데이 문화가 위축되는 가운데, 일부 연인들에선 데이 문화를 더욱 성대하게 즐기는 양극화 풍경이 이어질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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