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독자 관심 모았던 변장 취재기
정신은 시대 벽 넘어 살아있어
100년 전인 1925년 3월 특별한 인물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최은희(崔恩喜) 기자를 방문한 이야기다. 추계(秋溪) 최은희는 민간 신문의 첫 여기자였고 항일투사로도 활약했다. 그의 이름을 딴 '최은희 여기자상'은 그가 작고 1년 전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해 만든 상이다. 1984년부터 매년 뛰어난 여기자를 선정해 수상하고 있다. 시대의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은 그의 발자취를 찾아가 본다.
"기자는 다시 부인 기자로 계신 최은희(23)양을 지난 3월 9일 오후에 방문하였습니다. 최양은 지금부터 7년 전 1919년 봄에 시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봄은 누구든지 조금도 앞일을 헤아리지 않고 뜨거운 피에 날뛰던 때입니다. 최양은 학교의 몇 동지와 더불어 만세를 부르러 나아갈 때에 창과 칼에 상하는 이를 구호하고자 붕대와 고약을 지니고 학교를 나와 종로에 나와서는 일어나는 불길에 만세 수삼 창(唱)을 부르고 곧 총감부로 잡혀 가게 되어 무수한 고초를 받다가, 일주일 후에 감옥으로 넘어가서 24일 구류를 받은 후에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온 후 학교에서 주는 졸업장을 억지로 받아 가지고 고향 황해도 연백(延白)으로 내려간 최양은 다시 그곳에서도 운동을 쉬지 않아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해주 감옥에서 6달 동안 예심에서 쓰라리고도 적적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25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고향인 해주로 내려간 최은희 양에 대한 기사는 계속된다. "6개월의 철창 생활을 벗어난 최양은 2개년의 집행유예를 받아 가지고 불이나케 아버님을 뵈러 왔으나 아버님은 혼미한 중에서 최양이 출감한 지 사흘 만에 사랑하던 자녀를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황천길을 떠나셨습니다. 불행한 운명에 기구한 신세가 되어버린 최양은, 집행유예의 몸이 어디로 갈 수도 없어 얼마 지난 후 수원으로 평양으로, 평안남도 안주(安州)로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이 이곳저곳에서 교편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원 생활이 때때로 취미있는 때도 있었으나, 다시 더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동경에 건너가서 여자대학에서 2년 동안 형설(螢雪)의 공(功)을 쌓다가 여름방학이 되어 돌아오자 하나 뿐이던 남동생이 급성폐렴으로 죽게 되어 그의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박이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동경에 지진까지 일어나게 되어 다시 더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고향산천에서 꽃피는 아침 달 지는 저녁에 오직 괴악한 운명에 부딪치는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늙으신 어머님께 의탁하고 1년 동안을 책 보는 것을 소일삼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최은희는 기자 생활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매일 아침이면 일찍이 일어나서 밥도 뜨는 둥 마는 둥 마치고는 동(東)으로 서(西)로 아는 집 모르는 집으로 장안이 좁다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추운 날이든지 더운 날이든지 한결같이 집에 앉아있을 사이가 없이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사회상을 대할 때마다 각별한 느낌을 얻게 된답니다. 또 이렇게 분주히 찾아다닐 때 혹 어떤 곳에는 찾아가면 만날 사람이 없고 혹 어떤 곳에서는 사양하며 보기 좋은 거절을 당하여 그저 돌아설 때에 그 마음 가운데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으로만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또 다른 기사 재료를 구하러 가지 않으면 아니 될 바쁜 몸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녀서 신문사로는 정오에 들어가서 단촉(短促, 시일이 촉박하다)한 시간에 긴 기사를 쓰노라면 이마에 땀이 흐르고 마음껏 조급하여 펜을 놀리는 것이 마치 무슨 기계 돌아가듯이 바삐바삐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바쁜 기사를 마치고 3시쯤 나오면 또 이곳저곳으로 기사(記事)할 일로 또 쉴새 없이 바쁘게 다닙니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렇게 바쁜 생활이기 때문에 몸에는 큰 영향이 있어 건강에 많은 해를 받게 된답니다. 그 까닭은 제시간 대로 음식을 시간 맞추어 먹지 못하고 이때 저때 불규칙하게 먹게 되므로 자연히 몸이 쇠약해집니다. 밤에도 여자 단체에서 모임이 있으면 집에 들어갔다 가도 또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어 그곳에 참석하여야만 됩니다. 그런 여가에는 돌아다니는 몸이므로 옷은 잘 안 입더라도 정(淨)하게는 입어야 하겠으므로 집에 들어가면 바느질하기에 손톱만치도 쉴 여가가 없게 됩니다."
조선일보 기자로서의 활약상을 좀 살펴보면 재미난 것이 눈에 띈다. 1924년 10월 7일자 조선일보는 신문계에선 처음으로 기자가 변장을 하고 경성 시내에 출동하면 그 변장한 기자를 찾아내는 '현상 변장 기자 찾기'라는 것을 시작했다. 신문에 미리 변장한 기자의 모습과 활동 장소, 활동 시간을 알려주고 그 곳에서 변장 기자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이에게 상품으로 현금 10원을 주는 것이다.
최은희가 변장 기자로 활약한 기사는 10월 15일자부터 3일간 조선일보에 실린다. "해지고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썩인 끝에 겨우 작정한 것은 '행랑어멈'으로 변장하게 되었다. 땟국이 시커먼 어멈의 옷을 빌어 입었다. 먹을 풀어 목줄기로부터 이마까지 팔뚝으로부터 손가락까지 검은 분을 발라 놓고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 보니 틀림없는 비율빈(比律賓, 필리핀) 사람같이 되었다. (중략) 등에는 어린 아이를 업고 무청 한 아름을 안고 서대문정으로 나왔다. 때는 저녁 7시 5분이었다. 서대문정으로 나와서 당핏골, 야주개를 지나서 송현 마루터기까지 나왔다. 다시 안국동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왼편으로 있는 견지동 순사 파출소 앞으로 청석골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지나가는 청년 남녀 두 사람이 가던 걸음을 짐짓 멈추고 한참 동안이나 나를 쳐다 보고 섰다. 노루가 제 방귀에 놀란다는 격으로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나는 태연히 등에 업었던 어린애를 다시 추켜 업으며 '너도 불쌍하다. 너야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생을 하겠니. 다 어미 못 만난 탓이로구나'하고 자기의 신세 타령이나 하듯 하였다. 땅에 놓았던 무청을 다시 집어 들고 슬금슬금 걸어서 인사동을 향하였다. 신문사로 들어온 때는 11시 5분이었다. 신문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중은 나를 보고 깜짝들 놀라며 '설마 저렇게 차렸을 줄이야. 누가 알았담'하는 사람도 있고 '나도 어린애 업은 사람을 퍽 주의해 보았지마는 저렇게 반 거지같은 사람은 안 보았지'하는 소리가 들린다."
최은희는 1930년 7월 일본대학 법과 출신으로 법원에서 근무하던 미창(米倉) 이석영과 결혼한다. 결혼 후 신문사를 그만둔 최 여사의 소식이 1933년 9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다. "요사이 최은희 씨는 어떻게 지내는가. 이야말로 이론적 방향보다도 실천적 방향 전환을 하여 서대문 밖에서 '우표 장사'를 한다고 한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는 용기와 신념으로 언론계에 뛰어들었고,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필력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지금도 그의 뜻은 '최은희 여기자상'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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